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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홍국영 그는?

by 한국의산천 2008. 4. 29.

오늘 10시 드라마 '정조 이산' 하는 날이다. 빨리(? 현재 오후 8시 57분 ) 퇴근하자...

홍국영이 무리수를 두며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게 돌아가는데...

이글은 꼭 한달 전 지난 3월 25일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 무리수를 두고 있는 홍국영(역) ⓒ 2008 한국의산천

홍국영이 은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1779년 (정조3년) 5월 누이 원빈이 1년만에 죽자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정조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정조를 직접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고 세자로 책봉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결국은...

 

그 옛날 왕이라고 무엇이던 다 할 수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정조 이산에 등장하는 홍국영과 장태우. 그들은 누구인가? [2008· 3·  25·  화요일 흐림· 한국의산천]

 

세도정치(世道政治) 라는 말을 부각시킨 홍국영

※ 세도정치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원래 세도정치란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으나, 척신(戚臣) 또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홍국영이 정권을 담당한 이후 '世道政治'는 '勢道政治'로 타락, 변질되어 권세정치의 형태로 나타났다.[두산백과]

 

정조 이산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였지만 결국 하고자 했던 개혁,치국(治國)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버지 영조가 이루지 못한 개혁을 정조 역시 해내지 못했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정파와 20년 이상을 함께 정사를 논의 할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은 어떠 하였을까. 참아야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해서,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들에게도 효도를 해야하고 모든이들에게 공평무사해야만 버틸 수가 있었다.   

 

정조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신 스스로가 무명옷을 즐겨입고 헤진 옷을 기워 입으며 궁녀의 수를 줄이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고루 등용을했다. 문벌을 타파하고 붕당을 깨뜨리며 탕평책을 앞세웠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보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뿌리를 완벽하게 뽑지 못했고, 그들의 방해를 끊임없이 받았다. 기득권 세력의 자기 방어는 완강했던 것이다. 정조를 반대하는 벽파 또는 일부 노론들이 집권한 뒤에 정조의 여러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조는 영조가 만들어놓은 기초 위에서 열렬한 개혁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그 좌절을 맛본 것이다. 뒤따라 등장한 문벌정치는 부정과 불법, 벼슬의 독점 등 반동정치를 자행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조선은 막을 내리고 끝내 나라가 유리되는 현실을 빚었다.

그의 빛나는 개혁정치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간의 몸소 행하신 노력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남을 것이다.  

 

영조의 뜻을 이어 정조가 탕평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이유 4가지

1. 각 당파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논쟁 종식과 다른 당파에 대한 비방 살육전을 그치게 하기위함.

2. 균형있는 관직 배분과 문벌과 지역간의 이해관계  조정

3. 실력주의 원칙이 통하는 정치원칙의 재창조

4.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을 강화, 국왕의 백성통치력 강화, 군대 통수권강화등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함.  

   

 


▲ 극중 정조 이산 역 ⓒ 2008 한국의산천

 

정조때 왕세손(정조) 문제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에서서 이러한 모함에 좌절하지 말고 대항하도록 조언하면서 보좌한 사람은 홍국영 1인뿐이라고 회상하였다. 

 

영조 말년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 싼 외척간의 알력이 심해지자 정조는 외척간의 대립에 왕세손을 이용하는 그러한 작태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그러던 중 홍상간, 민항열 같이 눈에 띠는 신진기예들이 홍국영을 멀리하자 홍국영 역시 그들에게 굴복하며 붙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홍국영이 어느 특정 정파에 편들지 않아 친구가 거의 없는것을 알고 그를 신뢰하고 도와주려했고 , 홍국영 역시 곧은 마음으로 정조를 보좌하고 도왔다.

 

 외척당의 모함은 그 정도가 나로 심해져서 왕세손의 지위가 위험한 수위에 다다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조가 왕세손(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거나 왕위자체를 선양하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정조는 이때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에서서 이러한 모함에 좌절하지 말고 대항하도록 조언하면서 보좌한 사람은 홍국영 1인뿐이라고 회상하였다. 

 

▲ 혜경궁 홍씨 역 ⓒ 2008 한국의산천

 

혜경궁 홍씨는 홍국영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동궁(정조)께서는 (홍국영이)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얼굴도 예쁘고 눈치도 빠르고 민첩하기도 하니, 벌써 세상이 어지러웠던 때를 당하여  한 번 보고 크게 좋아하셔서 권우가 깊으셨다. 처음에는 요 작은 간사한 놈이 간사한 꾀를 내어 동궁께 곧게 충고 하는 체 하나 실은 다 듣기 좋은 말이라 .... 한번 홍국영이 들어오면 외간의 일을 여쭙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둥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으니 .... 마치 사내대장부가 간사한 첩에게 미혹 당한것과 같으셨다". 

이는 홍국영이 군주의 공부인 성리학은 안가르키고 쓸데없는 신기한 세상일만을 알려주었다는 비난이다. 즉 홍국영은 정조에게 세상의 일들을 그 모습 그대로 알려주는 통로이고 선배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백성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임금으로 통치하는데 큰 자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홍국영은 영조 재위당시 영조,혜경궁 홍씨,정순황후 김씨와 인척관계였다. 이런점에서 가깝다고 할수는 없지만 정조와도 12촌 형제로 인척간이 된다.

 

혜경궁은 말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가 홍국영을 특히 신임하여 수년 동안 사관으로 측근에 두고 "내 손자다" 라고 까지 하면서 아주 귀여워했다고 쓰고있다.   

      

▲ 홍국영 역 ⓒ 2008 한국의산천

 

24일 방송된 MBC 월화사극 대하사극 ‘이산’ 54회에서 의금부에 갇힌 도승지 홍국영을 찾았다. 좌의정 장태우는 "난 너 같은 놈을 뼈 속까지 잘 안다. 주상의 충복인척 하면서 결국 임금의 눈과 귀를 가려 조정을 손에 넣자는 것"이라며 홍국영을 질책했다. 이에 질세라 홍국영은 " 반드시 이곳에서 나가 나 같은 척신이 그 힘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기필코 보여주겠다" 며 맞섰다. 노론벽파 수장인 장태우와 노론벽파의 타도에 앞장서온 홍국영. 막강한 세력을 가진 두 중신간의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자못 궁금해진다.

    

홍국영 (洪國榮 조선 후기 문신1748(영조 24)~1781(정조 5).
홍국영은 1748년 (영조 24년)에 도성밖 서강(마포일원)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아명은 덕로(德老)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25세때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얼굴 생김이 예쁘고 준수했다고 전한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시강원사서로서 서명선(徐命善)·정민시(鄭民始) 등과 함께 세손(뒤의 정조)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776년 노론 청명당(淸名黨) 계열의 김종수(金鍾秀) 등과 연계하여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처형시켰다.

 

영조가 왕세손(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과 정후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당 세력은 조정과 궁궐안에서 이를 필사적으로 뒤집으려 하였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지 석 달만에 영조가 죽고 즉위하게 되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핍박했거나 홍국영을 죽이려 했던 세력들을 모조리 반역집단으로 귀향보내고 처단했다. 

 

▲ 홍국영 가계도 ⓒ 2008 한국의산천

 

홍국영의 6대조는 선조임금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남편인 영안위(永安慰) 홍주원이다. 정명공주는 광해군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비명에 죽은 영창대군의 동복누나로 인목대비 소생이다. 홍주원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외교적으로 큰공을 세운 이정귀이다. 홍주원은 처신이 깨끗하고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로 국왕의 행차를 모시는 데 진력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 칭송 받기도 했다.  

 

홍국영의 가문은 왕실과 연혼관계를 맺으면서 오랫동안 서울을 근거로 뿌리를 내린 가장 유명한 문벌가문 중의 하나다. 당시 오랜 기간 정승을 지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과 이복동생 홍인한도 같은 가문 사람으로 홍국영에게는 10촌 할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홍국영이 1772년 (영조48년) 가을 25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사실과 급제하자 마자 9월 하순경 왕위계승권자인 정조의 보좌역이라는 출세의 길로 달리는 좋은 보직에 제수받은 사실은 결코 우연이거나 권모술수에 의한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후 홍국영은 즉위년부터 시작하여 수어사, 훈련대장 등 5개 군영의 대장을 다 거치고 1777년 (정조1년) 초에 궁궐에 숙위소가 설치되자 도승지겸 숙위대장으로 대장패와 전령패를 가지고 궁궐안에 자유로이 머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사정이 그러하니 궁궐에 들르는 사람은 먼저 홍국영을 찾아보아야 했고 퇴궐하여 집에 가면 손님이 그득하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백관을 맹종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세도정치를 하였다.

당시 노론벽파의 지도자 였던 김종수 조차도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 할 정도로 세도가 무서웠다.  

 

1778년(정조 2)에는 누이를 원빈(元嬪)으로 삼게 하여 정권을 굳게 다졌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홍국영은 궤도를 이탈하여 정조의 통치 방식에 근본적인 위협을 주었고 결정적으로 정조는 정국안정을 위해서는 왕실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그를 퇴출시키게 된다.  

 

홍국영이 은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1779년 (정조3년) 5월 누이 원빈이 1년만에 죽자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정조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정조를 직접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고 세자로 책봉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혜경궁 홍씨는 "당시 홍국영이 내전의 나인들을 여럿 잡아다가 칼을 빼들고 혹형을 가하면서, 원빈이 독살된 증거를 찾기위해 멋대로 국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인해 왕대비,혜경궁 홍씨,왕비를 포함해 궁궐 내부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 붙이는 형국이 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압력을 감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홍국영이 왕위계승 문제에 뛰어들어 간섭했다는 사실이다. 원빈의 원(元)자는 '근본'이라는 뜻으로 왕위계승권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있어, 후궁은 사용할 수 없는 용어였다. 그밖에 여러가지 관련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었다. 결국은  1779년 9월 정조의 은퇴 권유로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조는 말했다. "이전과 이 후 천년에 걸쳐 이와같은 군주와 신하와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또 언제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 . "옛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奉朝賀)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奉朝賀)도 있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홍국영에게 은퇴한 정계 원로에게 주는 봉조하(奉朝賀)의 직함을 수여하고 숙위소도 없애버렸다.      

 

이후 1780년 왕후 독살기도에 연루되었다 하여 정민시·서명선·유언호(兪彦鎬)·김종수 등의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으로 추방되었고 이후 실의에 잠겨 지내다가 34세로 병사했다.

  

장태우 그는 누구인가?

 

▲ 깐깐한 풍모의 도덕주의자 장태우 역 ⓒ 2008 한국의산천

 

정조 이산에게 당당하게 할말을 다하는 '좌의정 장태우'는 누구일까. 실존인물의 이름이 아닌것만은 확실하다. 그럼 그시대의 학자 심환지 또는 김종수 역활을 맡은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정조 이산에서 얼마전 등장한 노론 벽파의 수장으로 나오는 좌의정 장태우. 정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남인과 서얼을 등용하며 대과에서 2000명을 새로 뽑는 등 조정을 개혁하고자 할 때 유생들에게 과거시험 출시를 막고 정면에서 정조에 맞서는 인물. 처음 등장에서부터 깐깐한 말투와 눈매로 거침없이 할말을 다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인 장태우는 "임금이 뜻을 잘못 펼치고 있으니 신하된 도리로 막겠다" 며 옳지 않은 일이면 정조와 팽팽히 맞설 것을 예감케 했다.

 

참고 인물

정조는 죽기 몇 주일 전 신하들과 대담한 오회연교(五晦筵敎)에서, 자신의 탕평정치의 기둥은 8년 정도 시련을 주었다가 믿고 골라서 등용한 3정승이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이 세사람을 선택한 기준을 ' 맑은 의견을 지키고 준엄한 정치원칙을 지닌 인물'이라고 밝혔다. 그 세사람은 노론 청명담의 김종수윤시동, 그리고 남인 청류당의 채제공이다.

    

김종수 벽파의 실질적인 지도자

김종수는 1728년(영조4년)에 태어나 1799년(정조23년)에 사망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이미 노론 청명당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였다.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다. 정조의 탕평정치,즉 각 당파의 강경파를 함께 써서 조화를 이루는 대화합의 정치에 전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오히려 그런 정치는 효과도 늦게 나타날분 아니라 결국은 원칙 없이 두리뭉실 하게 조정하는 정치가 된다고 하였다. 진정으로 옳바른 하나의 붕당이 주도하는 정치가 옳다고 주장했다. 즉 소론붕당이나 남인 붕당이 주도하는 정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종수 역시 자신의 집안만큼 노회한 정치가 였다.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좀처럼 바꾸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관철시키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라는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정조실록에 보면 김종수는 말년에 정조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고 나온다.    

  

심환지 원칙에 어긋난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 . 김종수를 이은 벽파의 최고 지도자.

심환지는 정조의 탕평정치를 파괴한 자로 낙인찍힌 인물이다. 그는 보수에 필요한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이상론의 신봉자로서 1730년 (영조6년)에 태어나 1802(순조 2년에) 사망했다. 영의정으로 사망한지 4년후에 벽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된 자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글과 문집은 없어져 버렸고 전해지지 않는다. 살아잇을 당시 성품이 검소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정조는 그를 정치원칙에 투철한 정치가라고 평하고 그의 문장 역시 훌륭하다고 평했다. 저서로는 '번암집'이 전해진다.

 

"정조 이산"에서 지금까지 정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실존인물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과 정약용을 뛰어 넘어설 정도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는 연암 박지원 그리고 이가환도 등장하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 한국의산천 - 

 

정조 관련 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의 고백>>>>> http://blog.daum.net/koreasan/13737026

정조이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http://blog.daum.net/koreasan/13691642

수원 지지대와 정조 이산의 효심 >>>>> http://blog.daum.net/koreasan/13675557

한중록 한듕록 읍혈록 혜경궁 홍씨 >>>>http://blog.daum.net/koreasan/14028037

한림(翰林)과 사관(史官)이란?   >>>>>>http://blog.daum.net/koreasan/13886930 

사당 경모궁 함춘원지 돌아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4043881

 

참고 관련서적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박광용]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해냄 이한우]

조선의 왕세자 교육[김영사 김문식 김정호]

한중록 [청목사刊 엮은이 박동우]

한중록 [일신서적刊 엮은이 남용]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著]

조선왕조실록 [들녘 박영규] 

이야기 조선 왕조사 [청아 출판사 이근호]

조선왕조사 [수막새 刊 김경수 ]

사관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가람 박홍갑]  

 

▲ 윗글 참고 관련서적 ⓒ 2008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