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의 '소유언시(小遺言詩)'에 나오는 지명을 따라 여행을 했습니다. [촬영· 한국의산천]
▲ 실오라기같이 펼쳐진 길과 논밭, 그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 가로림만(서산 팔봉산 제1봉에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충남 태안반도의 중북부 서산시와 태안군 사이에는 가로림만이라는 바다가 놓여 있다. 태안반도의 크고 작은 만들이 대부분 간척사업에 의해 육지로 바뀌었지만, 가로림만은 아직까지 자연 상태를 유지하며 남아있는 태안반도의 가장 큰 만이다.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으면서 서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은 그 폭이 불과 2.5km 정도밖에 되지 않아 늘 잔잔한 물결을 자랑한다.
태안반도의 지협부(地峽部)를 끼고 남쪽 천수만의 반대쪽에 만입하여 태안군 이원면, 원북면, 태안읍, 서산시 팔봉면, 지곡면, 대산면(大山面)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로림만은 남서 연안의 함평만과 함께 전형적인 호리병형(gourd type) 또는 병목형(bottle-necked type)의 폐쇄형 만이며 복잡하게 굴곡된 해안선이 발달하고 평균조차는 4.7m에 달하며 광활한 갯벌이 형성되어있는 곳이다. 부근 해안에서 성행하는 어업의 중심지이며, 굴 김 양식업도 성하다. 이북면을 건너 태안반도 서안은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루며, 만리포 천리포 학암포 해수욕장이 있다.
▲ 바닷물이 빠져야 곰섬(웅도)으로 들어갈수있다 ⓒ 2008 한국의산천
소유언시(小遺言詩)
- 황동규-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 원효
1
살기 점점 더 덤덤해지면,
부음(訃音)이 겹으로 몰려올 때
잠들 때쯤 죽은 자들의 삶이 떠오르고
그들이 좀 무례하게 앞서갔구나 싶어지면,
관광객도 나대지 않는 서산 가로림만(灣)쯤에 가서
썰물 때 곰섬(熊島)에 건너가
살가운 비린내
평상 위에 생선들이 누워 쉬고 있는 집들을 지나
섬 끝에 신발 벗어놓고
갯벌에 들어
무릎까지 뻘이 차와도
아무도 눈 주지 않는 섬 한구석에
잊힌 듯 꽂혀 있다가
물때 놓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하듯이.
▲ 안국사지에 있는 탑과 불상 그 뒤에 있는 자연석 남근바위 ⓒ 2008 한국의산천
▲ 안국사지에 있는 고려 불상과 그 뒤에 있는 자연석 남근바위 ⓒ 2008 한국의산천
2
그냥 가기 뭣하면
중간에 안국사지(安國寺址)쯤에 들러
크고 못생긴 보물 고려 불상과 탑을 건성 보고
화사하게 핀 나무 백일홍들
그 뒤에 편안히 누워 있는 거대한 자연석(自然石) 남근을 만나
생전 알고 싶던 얘기나 하나 묻고
대답은 못 듣고.
▲ 개심사 심검당의 휘어진 기둥 ⓒ 2008 한국의산천
개심사 둘러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4526848
▲ 개심사 가는 길에 느티나무도 만나고..ⓒ 2008 한국의산천
3
길 잃고 휘 둘러가는 길 즐기기.
때로 새 길 들어가 길 잃고 헤매기.
어쩌다 500년 넘은 느티도 만나고
개심사의 키 너무 커 일부러 허리 구부린 기둥들도 만나리.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한 새들도 있으리.
혹시 못 만나면 어떤가.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
나무, 집과 새들을 만났다.
이제 그들 없이 헤맬 곳을 찾아서.
▲ 가로림만을 따라 답사하면서 해변 풍경 ⓒ 2008 한국의산천
▲ 아 언덕이 하나 없어지고 크레인 한대가 고개를 휘젓고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4
아 언덕이 하나 없어졌다.
십 년 전 이곳을 헤매고 다닐 때
길 양편에 서서 다정히 얘기 주고받던 언덕
서로 반쯤 깨진 바위 얼굴을 돌리기도 했지.
없어진 쪽이 상대에게 고개를 약간 더 기울였던가.
그 자리엔 크레인 한 대가 고개를 휘젓고 있다.
문명은 어딘가 뻔뻔스러운 데가 있다.
남은 언덕이 자기끼리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날의 갖은 얘기 이젠 단색(單色) 모놀로그?
▲ 대호방조제의 여명 ⓒ 2008 한국의산천
5
한 뼘 채 못 되는 시간이 남아 있다면
대호 방조제까지만이라도 갔다 오자.
언젠가 직선으로 변한 바다에
배들이 어리둥절하여
공연히 옆을 보며 몸짓 사리는 것을 보고 오자.
나이 늘며 삶이 점점 직선으로 바뀐다.
지난 일들이 빤히 건너다보이고.
▲ 소금이 만들어지는 염전 ⓒ 2008 한국의산천
6
곰섬 건너기 직전
물이 차차 무거워지며 다른 칸들로 쫓겨다니다
드디어 소금이 되는 염전이 있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든 억지로든
칸 옮겨 다님,
누군가 되돌아가지 못하게 제때마다 물꼬를 막는다.
자세히 보면
시간에도 칸들이 쳐 있다.
마지막 칸이 허옇다.
▲ 이제는 더 이상 소금을 만들지 않는 염전 ⓒ 2008 한국의산천
7
물떼샌가 도요샌가
긴 발로
뻘에 무릎까지 빠진 사람은
생물로 치지 않는다는 듯이
팔 길이 갓 벗어난 곳에서 갯벌을 뒤지고 있다.
바지락 하나가 잡혀 나온다.
다 저녁때
바지락조개들만
살다 들키는 곳.
▲ 가로림만 해변가 풍경. 멀리 팔봉산과 그 옆으로 백화산이 보인다 ⓒ 2008 한국의산천
▲ 어둠이 내린다. 이 멈출 길 없는 떠남! 내 안에서 좀체 말 이루려 않는 한 노엽고, 슬거운 인간을 만난다. 곰처럼 주먹으로 가슴 두들기고 밤새처럼, 울고 싶다 ⓒ 2008 한국의산천
8
어둠이 온다.
달이 떠오르지 않아도
물소리가 바다가 된다.
밤새가 울 만큼 울다 만다.
왜 인간은 살 만큼 살다 말려 않는가?
생선들 누웠던 평상 위
흥건한 소리마당 같은 비릿함,
그 냄새가 바로 우리가 처음 삶에,
삶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 자리!
그 속에 온몸 삭히듯 젖어
육십 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이 멈출 길 없는 떠남! 내 안에서 좀체 말 이루려 않는
한 노엽고, 슬거운 인간을 만난다.
곰처럼 주먹으로 가슴 두들기고
밤새처럼,
울고 싶다. [소유언시(小遺言詩) - 황동규 - 촬영: 한국의산천]
▲ 지난 해 웅도에서 가로림만을 거쳐 학암포까지 답사 중에... ⓒ 2008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바다 가로림만을 배경으로 (서산 팔봉산 정상) ⓒ 2008 한국의산천
나는 또다시 대호방조제를 지나 곰섬(웅도)를 둘러보고 가로림만 해변을 따라 가다가 팔봉산에 오르고 다시 이어서 이원면을 지나 학암포- 신두리 까지 답사를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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