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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수표교 장충단

by 한국의산천 2008. 2. 19.

수표교와 장충단(奬忠壇)  

[답사·촬영.2008. 2. 19 화요일 맑음 한국의산천 ]

다리 보수의 기록을 일일이 다리의 돌에 새긴 조상의 지혜가 깃든 아름다운 다리 수표교

현재까지도 선조들이 하신 수표교처럼 보수의 기록을 남기며 관리했다면 성수대교 붕괴같은 대형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화요일 아침 업무차 한양 나들이를 하며 장충단에 있는 수표교 촬영하기 위해 아침 7시 길을 나섰다. 

▲ 성산대교의 일출.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일요일 세검정 답사시 만난 일출을 오늘 또 다시 성산대교에서 만났다.ⓒ 200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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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내다리 (조암교) >>> http://blog.daum.net/koreasan/13967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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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단 (奬忠壇) ⓒ 2008 한국의산천

남산의 동북쪽 기슭에 있는 장충단공원은 조선조 영조 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있던 자리이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들을 물리치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년 11월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고 1908년까지 해마다 봄·가을로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면서 제사를 지냈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을 얹고.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 제목은 뒤에 순종(재위 1907∼1910)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썼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웠고,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겼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사당은 6·25 전란 중 파괴되고 사라져 버렸다.   

▲ 장충단 (奬忠壇) ⓒ 2008 한국의산천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또한 자신들에대한 반일 감정을 상기시키는 장충단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며, 1919년에는 이 일대를 공원화하며 벚꽃을 심고 연못과 놀이터를 조성하여 엄숙한 장충단을 놀이공원으로 조성하고, 상해사변 때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 동상을 세우고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초대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절을 현재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경복궁 안 선원전을 옮겨 짓고, 정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옮겨왔다. 이렇게하여 '조선의 궁을 해체하고 민족혼을 짓밟으려한 획책'이었다.  

그 후 광복이 되고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장충단 공원에 사명대사와 이준·이한응 열사의 동상을 모시면서 일재의 흔적을 지우고 현재의 공간으로 재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는 1984. 9. 22 건설부고시에 의해 장충단공원은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 합병되고 나머지 구역은 장충단공원이라는 예전의 이름 그대로 불리고 있다.  서대문에 있는 사직공원도 역시 일본인의 이러한 맥락으로 사직공원으로 둔갑하였다.  

▲ 장충단(奬忠壇) 공원내에 자리한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장충단공원 일대는 장충단비, 수표교, 승정전, 관성묘, 와룡묘 등 문화재를 비롯하여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 이준열사, 김용환 선생 동상 등이 있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애국충정이 깃든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다. 


▲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했던 수표교(水標橋·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세피아톤으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청계천에서 옮겨온 수표교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 입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다리. 길이 27m, 너비 7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원래는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이때 다리의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은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졌다.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수표교는 세종2년(1420년) 현재의 청계 2가 자리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대표적 석재 다리로, 북촌(종로구 관수동)과 남촌(중구 수표동)을 연결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말시장인 마전(馬廛) 앞에 있다고 해서 마전교라고 불렸으나, 세종 23년(1441년) 다리 서쪽에 나무로 수표(水標)를 만들어 세우고 성종 무렵 이 수표를 다시 석재로 바꾸어 하천 수위를 측정하면서 수표교라고 부르게 됐다. 

▲ 장충단(奬忠壇) 공원내에 자리한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이 다리 앞에 같이 놓여 있던 수표석주(手標石柱)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청량리 세종기념회관 뜰 안으로 옮겨져 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가 27m, 폭 7m, 높이가 4m 이다.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마름모꼴로 교각을 배치하고, 그 위에 길이 4.5m나 되는 장대석을 걸쳐 놓았다. 좌우에는 돌난간을 설치하고 바닥은 청판석 을 4줄로 깔았다.
그리고 다리밑 교각은 거대한 화강석으로 절묘하게 가설을 하였으며 교각기둥에는 주척 1자로 그 길이는 평균 21.5㎝의 간격으로 눈금을 새겨 놓았다. 

▲ 수표교 교각 ⓒ 2008 한국의산천    

다리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주제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 교량과 얽힌 이야기로는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와 눈이 마주쳐서 마음에 두고 있다가 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으며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에 관한 이야기도 배어있다.

 

조선 독립군 총사령관,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알려진 김두한은 이곳 수표교 밑에서 자랐다.

김두한(金斗漢 1918년5월15일~1972년11월21일)은 1918년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했다. 청산리에서 일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알려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이리저리 쫓겨다니다보니 교동 보통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장군의 아들은 고아로 청계천의 수표교 밑에서 자랐다.

역대 국회의원 인명록에 나타난 김두한의 기록을 보면 "김좌진 장군의 2세이자 장자구다리(지금의 광교) 아래서 자고 밥을 얻어 나르던 똘마니였다. '입뽕'이란 이름의 협객이 되어 종로를 어지럽히던 신마적·구마적을 때려눕히고 공산당을 때려잡던 옛날 얘기로 유명하다. 3대(종로을·무소속), 6대(용산·한독당)에 걸쳐 재선의원이 되었다. 가는 데마다 뉴스를 만들고 트러블을 만드는 사나이. 6대 국회에서는 오물투척사건으로 구속까지 되었다. 형무소 출입만 해도 무려 80여 회에 달한다."(참고:'역대 국회의원 약력 및 헌정일지',' 한국근현대사 인명록')  

▲ 시골의 한옥 마룻장처럼 깔린 청판석이 닳아 장판처럼 매끄럽다.ⓒ 2008 한국의산천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마름모꼴로 교각을 배치하고, 그 위에 길이 4.5m나 되는 장대석을 걸쳐 놓았다. 좌우에는 돌난간을 설치하고 바닥은 청판석 을 4줄로 깔았다. 

수표교의 청판석을 보니 어렸을 때 수표교와 꼭 같은 집의 두꺼운 송판 마룻장 한장을 빼내어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다시 갔다놓은 생각이 난다.  

 

▲ 돌로 잘 짜여진 수표교 교각 ⓒ 2008 한국의산천  

수표교는 대광통교인데 종루길에 잇대어 있는 서울 도성안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이 다리는 서울 한 복판을 꿰뚫고 흐르는 청계천 위에 설치되어 있고 한껏 조형미를 살려 놓은 아름다운 돌다리로 뭇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다리 전체의 짜임새와 형태가 조화있게 면밀히 짜여 있을 뿐 아니라 다리 양쪽가에는 돌난간이 세워 있어 한층 섬세하여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수표교 다리는 청계천 위에 놓인 많은 다리 중에서 임금행차가 자주 있던 다리였다. 지금 중구 저동의 중부경찰서 자리 일원에 세조의 딸 의숙공주의 사사집인 영희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공빈 김씨 조사로 봉자전이라 부르더니 이후로 태조 세조의 영정을 모시고 영희전이라 하였다.
영조는 이 전을 크게 늘리고서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도 모셔 남별전이라 했다. 이 곳에서 오속절(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과 납일마다 제례가 거행되니 임금의 거동이 자주일 수 밖에 없었다. 이때마다 임금의 행차가 이 수표교를 건너게 마련이었다.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수표교 거동 행렬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종로의 역사 참고) 

▲다리 귀틀돌에 새겨진 수표교의 보수 기록을 보여주는 각자(刻字) ⓒ 2008 한국의산천 
조선 시대에는 돌다리를 고치거나 하천 바닥을 파고 나면 다리 일부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築(정해개축)','(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리기둥에 새긴 '경진지평'은 '경진년에 준천한 바닥의 기준'을 나타내며, 수표교의 귀틀돌에는 '무자금영개조'(무자년에 금위영에서 다리를 고쳤다)는 '정해개축(丁亥改築 정해년에 다리를 고쳐 지었다)'이라는 두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두 문장이 영조의 준천 뒤 새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무자'는 영조 이후 첫 무자년인 순조 28년(1827년)이며, '정해'는 두번째 정해년인 고종 24년(1886년)이라고 추정한다. 현재 남아있는 수표교에는 '무자금영개조' 가운데 '영개조(營改造)'만 남아있는데, 1959년 청계천 덮기 공사 때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지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해개축'은 그대로 남아있다 

▲수표교 다리 중간쯤에 있는 기둥에 새겨진 경진지평 (경진년에 준천한 바닥의 기준) 각자(刻字) ⓒ 2008 한국의산천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 ·준천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하천 준설과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 

▲ 세피아 톤으로 촬영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1441년(세종 23)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세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수표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는데, 그뒤 수표교라 바뀌었고 이 일대 동네를 수표동이라 하였다.

마전교는 1420년(세종 2)에 놓아졌는데 '동국여지승람' 교량조(橋梁條)에는 수표교로 되어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석재(石材)를 가구식(架構式)으로 짜맞추어 세운 돌다리이다.

▲ 장충단(奬忠壇) 공원내에 자리한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영조 때는 수표교 북쪽 냇가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어 토사를 걷어 둑을 쌓게 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때 쌓아놓은 모래가 긴 뱀처럼 쌓여 있어서 현재 장사동(長沙洞)이 유래하였으며, 쌓아놓은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꽃을 심으니 향기로운 산이 되었다는 데서 방산동(芳山洞)이 유래하였다. 지금도 가운데 교각 기둥 한 곳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 새겨두어 준천사업을 하는 기준점으로 삼았다.  

▲ 수표교 너머로 신라호텔이 보인다(호텔 영빈관 자리가 본래의 '장충단' 자리이다) ⓒ 2008 한국의산천 

▲ 북악산 창의문 앞에 세워진 청계천 발원지 표석 ⓒ 2008 한국의산천

청계천(淸溪川)은 서울 북악산 등에서 발원하여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을 거치며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른 하천이다. 본래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었다.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복개 사업과 1970년대에 완공된 청계고가도로의 환경 오염 및 노후에 따른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공약사항으로 추진되었으며,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를 걷어내는 복원 사업이 서울특별시에 의해 추진되어 현재는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 km의 구간이 복원되어 산책로, 녹지 등이 설치되었다. 현재 복원된 청계천에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인공적으로 끌어 올려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한다.

▲ 물 맑은 청계천에 설치되어 긴 세월의 서민의 생활을 간직한 아름다운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것. 청계천이 복개되며 아름다운 수표교는 장충단으로 이전하였고, 그 청계천은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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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내다리 (조암교) >>> http://blog.daum.net/koreasan/13967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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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한국의산천

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다리는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인연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이쪽과 저쪽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물은 모두 다리인 것이다. 나무 잔가지인 섶나무를 엮어서 놓은 다리인 섶다리와 낮은 개울에 듬성 듬성있는 돌다리를 보노라면 지나버린 아쉬운 옛 추억이 떠오르며 아련한 따스함을 느낀다. 그 다리를 찾아서...

한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나그네는 또 다시 길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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