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by 한국의산천 2008. 1. 14.

'그의 통기타 노래가 그립다' 김광석 12년 추모콘서트 [2008. 1. 6 ]

 

 

▲1993 학전블루에서 김광석  

 

21470

▲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서른즈음에/변해가네 3곡이 연속 재생됩니다. 

 

노래 다시 부르기의 명반 이등병의 편지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포기 친구얼굴 모든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않게
열차시간 다가올때 두손잡던 뜨거움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한장 고이 접어 보내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헤어스타일은 5:5 갈매기형 스타일의 순진한 수줍음을 타는 듯한 모습의 김광석. 큰형이 군에서 사고로 죽자 김광석은 6개월만에 제대하고 부른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형을 그리는 노래였을까?  자신을 돌아보는 노래였을까... 

그는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노래 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영원한 이등병입니다. 왜냐하면 큰형이 군에서 사망하셔서 그 혜택으로 6개월만에 제대를 하였습니다"라며...그리고 쓸쓸히 웃는 모습의 동영상을 접한것이 2002년이었다.

 

나는 그의 노래중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 나의 지나간 3년의 군생활이 떠오른다. 꿈에서 조차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기억이다.
기억이란 묘비명처럼 단단한 암석판에 각인된 글이다. 
 
밤마다 연병장 구석 배구장에서 벌어지는 선임의 짧은 연설과 까만 허공을 춤추듯 가르며 내리 꽂히는 몽둥이 구타, 홍천에서 수타사를 지나 계방산~ 오대산~ 강릉까지 왕복하는 천리행군, 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영하의 날씨 몸에 밧줄을 묶고 쩍~쩍 소리내며 갈라지는 얼음장위를 기어서 의암댐 침투 폭파훈련, 백달리 유격장, 굴지리유격장에서의 유격훈련, 한겨울 강재구소령 공원이 있는 성동골짜기 산에서의 화목작업, 구보 사격에서 우수한 성적에 들지 못하면 한겨울에 얼음이 얼은 홍천강에 들어가기, 대관령에서의 스키설상 훈련,홍천강 시원한 물에서 한여름을 보낸 전투수영 훈련과 수류탄 던지기...

더구나 군생활 3년 중에서 1년만에 비교적 일찍 내무반장을 맡아 늘 가슴을 억누르는 무한의 책임.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으로 마음 편치 않은 군생활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푸른시절의 돌아 올 수없는 추억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시절 부른 거리에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서른즈음에, 이등병의 편지,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등 수많은 곳을 부르고 또 리메이크하며 원곡보더 더 낫다는 평을 들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그가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인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사인은 자살로 판명됐고, 가장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시기인 데다 아무런 유서도 발견되지 않아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지나간 그의 추모공연과 함께 관련기사를 소개합니다. - 한국의산천 -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늘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도 있고, 전혀 황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늘 희망 적입니다. 이룰 수 있는 꿈이건, 이루지 못한 꿈이건 꿈을 꿀 수 있 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린 행복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 저는 언제나 그 얼굴이 되고 싶습니다. [김광석의 '수첩' 중에서]

 

 

▲ '영원한 가객' 김광석 노래비 제막식

 

'이등병의 편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붉은 천에 싸여 있던 김광석의 노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1996년 1월 6일(음력 11월 15일) 세상을 떠난 고 김광석이 1991년부터 95년까지 1천회 공연을 펼쳤던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 블루 앞마당에서 6일 오후 그를 기리는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병자년(丙子年)에 세상을 떠나 무자년(戊子年)인 올해로 꼭 12주기가 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장인 조각가 안규철 교수가 만든, 브론즈 부조가 대리석 단상에 얹힌 노래비에는 통기타를 치고 있는 생전의 김광석이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들을 수없이 찾아내 우리들에게 들려준 영원한 가객(歌客) 김광석(64~96), 그가 95년 8월 11일 이곳 학전 소극장에서 콘서트 1천회를 맞았다'는 글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김광석추모사업회 김민기 회장, 김광석의 형인 김광복씨, '서른 즈음에'를 작사·작곡한 강승원씨, 박학기·동물원·유리상자·드렁큰타이거·김제동·윤도현·작곡가 김형석씨 등 동료와 팬클럽 둥근소리 회원들이 참석했다.

 

제막식에 이어 작은 음악회도 마련됐다. 1996년 그의 49제 때 연세대학교, 99년 학전 블루에서 열린 후 세 번째 추모공연이다.이날 관객들은 김광석의 노래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공연 중간, 김광석의 생전 영상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어요. 또 환갑 때 연애하고 싶어요. 로맨스. 쉽지 않겠지만 바람입니다." [부산일보]  

 

노래만 해야지. 난 노래만 해야지.” [문화일보]

15년 전 그 때처럼 학전 소극장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무대 한 쪽에 걸려있는 김광석의 사진을 올려다보며 이소라는 나직이,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가끔 나는 왜 연예 프로그램에서 안 불러줄까 생각하다가도 광석 오빠를 떠올리면 늘 생각해요. 그래, 노래만 해야지. 난 노래만 해야지.”

 

 


이어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흐르는 ‘서른 즈음에’의 반주.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파편화해 떠돌던 저마다의 기억들이 순간 어느 한 지점에 응축된다. 사람들의 가슴은 이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김광석이 죽은 지 12년이 되는 지난 6일,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는 김광석의 노래비 제막식과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그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무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울고 웃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광석의 친구 박학기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광석이를 만나고 싶을 때 꽃 한송이, 소주 한 잔 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기쁘다”고 했다. 형 김광복씨는 “광석이가 대구말로 ‘형아’ 하던, 고집스럽고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광석아 이제 억울해 말고 잘 지내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 너무 좋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좁디좁은 학전 소극장 앞마당은 삶 속에 김광석의 노래를 체화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는 지난 96년 서른 둘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뭇 ‘대중’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4장의 정규 음반과 베스트 앨범 등 그의 음반 판매량은 500만장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왜 그의 노래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의 노래는 대중가요나 민중가요이기 이전에 ‘삶의 노래’였다. 사람들의 인생 안에 녹아들어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군대에서 혼자 부르기 시작한 ‘이등병의 편지’가 ‘떼창’이 된 기억, 연인과 헤어진 후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던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등 추억담은 끝이 없다. 무언가 뜨겁고 절실했던 시절, 시대적인 집단 기억도 한몫했다. ‘광야에서’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등의 노래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가득찼던 청년들을 울렸다.

 

 이날 부인과 함께 온 정명호씨(39)는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노래다. 김광석이 죽기 한 해 전에 이곳 학전 공연에 왔었다. 그 울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대학교 때 통기타 동아리에서 김광석을 알게 됐다는 나채현씨(27)는 ‘보조석’이라고 쓰인 티켓을 보여주며 좋아했다. “대학교 때 친구들끼리 김광석 아저씨 추모공연을 했어요. 이곳에 너무 오고 싶었는데 추첨에 떨어져서 오늘 새벽 6시부터 와서 죽치고 기다려 겨우 보조석을 얻었습니다.”

 

 

공연은 괜한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았지만, 굳어졌던 가슴을 데우기에 충분했다. 오후 4시에 시작된 공연은 예정된 시간인 6시를 지나, 7시반까지 이어졌다. 윈디시티는 “김광석씨가 캐리비안 지역에 살았다면 이런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만들어봤습니다”하며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레게버전으로 바꿔 불렀고, 드렁큰타이거는 ‘서른 즈음에’를 듣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며 자신의 노래 ‘엄지 손가락’을 불렀다. 이적은 통기타를 들고 ‘정면승부’했다. 작곡자인 문대현이 직접 나와 ‘광야에서’를 부를 때 사람들은 목청을 높여 함께했고, 동물원이 무대에 올라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부를 때는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점점 더 커지는 듯했다. 그의 노래들은 여전히 가슴을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다시 김광석이었다.

 

 콘서트에 참석한 선후배 뮤지션들은 저마다 그에 대한 기억을 쏟아냈다. 성시경은 ‘이야기와 진심이 담긴 그의 노래’를 얘기했다. 김제동은 “사람이나 세월에 상처 받았을 때 나에게 빨간약 같은 노래였다”고 했다. 타이거JK에게는 ‘힙합만 진실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다. 92년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는 이적은 “그 모습이 노래하는 사람의 원형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진짜 노래’가 있다면 그것은 김광석의 노래일 것이라는 그리움이 120석의 작은 소극장 안에 멍울졌다.

 

 문득 얼마 전 김광석 노래비와 관련한 기자회견장에서 학전 대표 김민기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광석이는 음악보다는 ‘노래’라 할 수 있어요. 초대권도 안 돌리고, 매체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1000회 공연할 수 있었던 건 노래의 힘이죠. 무대 위고 앞, 옆, 계단 사이사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그의 노래를 들으러 왔어요. 진정한 ‘대중가수’였지요. 대중음악이 사멸되는 지금 어떤 키워드로 다시 되돌아보고 매달릴 것인가 생각했을 때, 김광석의 ‘노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인 것이지요.”

마지막 무대는 ‘나의 노래’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나의 노래는 나의 힘/나의 노래는 나의 삶….’ 그의 노래는 이제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삶이 되었다.

[문화일보 이로사 기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 노래는 멀리멀리 날아가리 [조선일보 한현우 기자]

歌客 김광석 노래비 세우고 추모공연한 '김광석의 사람들'

서른 두 해 짧은 기간, 가수 김광석이 지구에 머무르며 숱한 노래를 남긴 뒤에는 든든한 친구와 선후배들이 있었다.

지난 6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입구에 김광석(1996년 사망) 노래비를 세우고, 이어 열린 추모공연 무대에서 김광석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 개런티 없이 출연했고, 음향과 조명, 무대장치도 모두 '김광석의 사람들'이 무료 제공했다.

추모행사를 기획한 김민기 학전 대표는 김광석추모사업회 회장이다. 김광석은 91년부터 5년간 학전을 비롯한 소극장들을 돌며 '1000회 공연' 기록을 세웠다. 95년 8월 '1000회 돌파 기념공연'도 학전에서 열었다.

 

그룹 동물원 멤버들은 86~87년 김광석이 고려대 앞에서 '고리'란 카페를 운영할 때부터 함께 지냈다. 당시 김광석은 노래패 '새벽' 멤버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 첫 공연을 준비하면서 동물원 데뷔작업을 했다.

김광석은 남이 쓴 곡을 받아서 탁월하게 해석하는 보컬리스트였다. 6일 무대에는 김목경·문대현·한동준·김형석 네 작곡가가 올랐다. 한국 블루스를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김목경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작곡가다. 그의 1집에도 수록된 이 곡을 김광석은 94년 '다시부르기 2집'에서 리메이크했다.

 

 영화·드라마음악을 만드는 문대현은 '광야에서'를 썼다. 성균관대 노래패 '소리사랑' 출신인 문대현은 83년쯤 노래패 모임에서 김광석을 처음 만났다. 문대현은 "'광야에서'는 84년부터 알려진 곡이었는데 김광석이 '다시부르기'를 녹음하면서 가져다 쓴 곡"이라고 했다. '너를 사랑해'의 싱어송라이터 한동준은 김광석 최초의 히트곡인 '사랑했지만'을 작곡했다. 김형석은 '사랑이라는 이유로'의 작곡가. 그는 이날 "광석이형과 첫 녹음할 때 피아노를 치며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너 집에 가라'는 소리를 들었었다"며 웃었다.

박학기와 장필순은 김광석의 동갑내기 친구. 두 사람은 63년생, 김광석은 64년 1월생이지만 친구로 어울렸다. 박학기는 "친해진 뒤 알고 보니 대구 살던 초등학생 때 같은 동네 살았었다"고 말했다.

 

 윤도현과 유리상자는 김광석 공연에 게스트로 단골 출연하던 뮤지션. 윤도현은 게스트 시절 '타잔'을 주로 불렀다. 윤도현은 이날 "광석이형 공연대기실엔 늘 닭튀김이 있어서, 지금도 광석이형 생각을 하면 닭튀김 냄새가 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리상자의 박승화 역시 김광석 공연 게스트로 솔로 데뷔했다.

노영심과 이소라는 김광석을 가까이 따르던 후배들. 이소라는 이날 첫 출연자로 나와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노영심은 감기몸살로 불참.

 

이날 김광석과 직접 친분이 없는 후배들이 여럿 무대에 올랐다. 이적은 "대학 1학년이던 92년 바로 이 학전소극장에서 김광석 공연을 봤다"며 '기다려줘'를 불렀다. 드렁큰타이거의 타이거JK는 "'서른 즈음에'에서 영감을 얻은 제 곡이 '엄지손가락'"이라고 했다. MC 김제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김광석 팬. 김제동은 "'김광석 노래를 컬러링으로 쓰는 사람들 대표'로 왔다고 생각해 달라"고 말해 관객들을 웃겼다.

이날 오후 4시쯤 시작한 공연은 7시20분이 돼서야 끝났다. 추첨을 통해 판매한 140석은 경쟁률 15대 1을 넘었고, 나머지 자리엔 '김광석의 사람들'이 앉았다. 동물원 옛 멤버 김창기가 소주와 오징어를 들고 와, 공연 중반부터 출연자 대기실과 무대가 동시에 들썩거렸다. 대부분 출연자들이 뒤풀이에서 날짜를 넘기며 잔을 기울였다. 이 자리에서 70년대 포크듀오 '4월과 5월'의 백순진이 "비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로 시작하는 '등불'을 부르자, 모두들 화음을 넣어 따라불렀다. 그 합창 속에서 얼핏, 김광석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김광석 1964년 1월 22일 대구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82년 명지대에 입학한 뒤, 신촌 카페 등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84년 '노찾사' 1집에 참여하면서 노래운동에 몸담았고, 88년 동물원으로 데뷔하면서 포크음악으로 전환했다. 89년 솔로데뷔 후 95년까지 음반 6장을 내고 공연 1000회를 넘기며 '가객(歌客)'으로 불렸다. 96년 1월 6일 새벽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돌연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그의 사인(死因)을 자살로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