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의 필경사 석문방조제
[2007. 8. 19. 일요일 한국의산천 ]
새벽 04시 인천 출발
서해대교를 지나 필경사 경유한 후 석문방조제를 지나 도비도~ 난지도 이동.
서해안 고속도로 - 송악 IC(서해안고속도로 밑) - 부곡.고대국가공단(동부제강) - 한보철강 필경사 - 석문방조제- 왜목마을 - 도비도 - 배타고 난지도.
▲ 서해대교 ⓒ 2007 한국의산천
▲ 필경사 입구의 송림 ⓒ 2007 한국의산천
▲ 송림앞에 있는 시비 ⓒ 2007 한국의산천
필경사
필경사는 심훈 문학의 산실이다. 심훈은 193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한 동안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면서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 필경사이다.
필경사를 지을 터를 잡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러는 둥에 아끼던 상아 빨뿌리를 잃어버렸다. 그것을 찾기위해 돌아다닌 곳을 되짚어 다니다가 빠트렸던 상아 빨뿌리를 찾는 곳이 지금의 필경사 자리였다 한다. 빨뿌리를 찾아 담배를 피워물고 앉아 살펴보니 사람들이 길들일만 한 터더라는 생각에 지은 집이 필경사라고 전한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옹이 되사가지고 관리하다 당진군에 희사하였다.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록수'는 1935년에 이 집에서 집필된 소설이다. 가옥의 형태는 아담한 건물로서 18.7평이며 앞에는 상록수문화관이 있다.
▲ 상록수 기념관 ⓒ 2007 한국의산천
▲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시비(그날이 오면) ⓒ2007 한국의산천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 ⓒ 2007 한국의산천
필경사의 옥호는 상록수 집필에 앞서인 34년 11월에 쓴 그의 고백수기 '필경사 잡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1930년에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라고 그의「필경사 잡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다.
'필경사 잡기'는 그 시기에 그가 인생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해 고뇌했던 흔적과 그 사상을 보여준다.
나는 어려서부터 문예에 뜻을 두었었다. 시를 쓰는 체, 각본을 꾸미는 체하고 영화박이는 흉내도 내고 여러해 보람없는 저널리스트 노릇도 하다가 최근에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바늘구멍으로 낙타를 끄집어 내려는 대담함에 식은 땀이 등어리를 적심을 스스로 깨달을 때가 많다. 동시에 더욱이 문예의 길이란 가시밭을 맨발로 밟고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난한 것을 깨달았다...적어도 한 십년하고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노력과 수련을 쌓는 시기가 있어야 비로소 제일보를 내어 디딜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랑성을 다분히 타고난 나는...오늘날까지 정신생활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인 몽환경을 더듬으며 헤매어 왔다. ...
어줍지 않은 사회봉사, 입에 발린 자기희생,그리고 그어떤 주의(이념)에 노예가 되기전에 맨 먼저 너 자신을 응시하여라!
새로운 생활에 말뚝을 모래성 위에 꽂지 말고 질척질척한 진흙 속에다가 박아라. 떡메질을 해서 깊이 깊이 박아라.
(필경사 잡기中에서)
▲ 심훈의 부조 ⓒ 2007 한국의산천
심훈(沈熏)
1901∼1936. 소설가·시인·영화인.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으로 삼준 또는 삼보가 있고 아버지 상정(相珽)의 3남1녀 중 3남으로 서울 노량진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번안의 〈장한몽 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 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하였다. 같은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 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 常綠樹〉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문화관광부 선정 1996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 필경사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 필경사를 나와서 석문방조제로 이동. ⓒ 2007 한국의산천
▲ 석문방조제 ⓒ 2007 한국의산천
▲ 석문호 ⓒ 2007 한국의산천
▲ 석문호 준공 기념비 ⓒ 2007 한국의산천
필경사 가는 길
서울, 경기, 천안에서
○ 서해안 고속도로 - 송악 IC - 한보철강 방향 대로 - 필경사 이정표에서 좌회전.
당진 난지도 가는 길에...
난지도 상세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2307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