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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소설 남한산성 - 김훈

by 한국의산천 2007. 6. 3.

남한산성  

답사

2007년 6월 3일( 섭씨30도를 오르 내리는 일요일)  [한국의산천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해 겨울, 이곳 남한산성에는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 동문옆에 서있는 남한산성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성곽따라 산성 한바퀴(벌봉포함) 구간별 소요시간 성남시 수정구 민속공예 전시장 앞 07: 30분 등산시작 - 약사사 - 검단산~남문 능선 - 남문도착 ( 8시 20분 ) - 수어장대 (08:50분, 간식 ) - 서문(09:15분) -동장대 암문(식사) - 10:25분 - 벌봉, 남한산 왕복 (11: 15)  - 동문 12:00 - 남문 (12: 50분) - 주차장 (13: 30분)  총 소요시간간식시간, 점심시간, 촬영기록시간 포함 : 6시간  (약 11km) 성곽일주만을 원한다면 남문까지 차로 올라 간 다음 주차시키고 일주 할 수 있다. 남문에서 일주시간 약 4시간 소요(휴식시간 포함) 

 

 

▲ 지인께서 보내준 김훈 장편소설 <남한산성> ⓒ 2007 한국의산천

 

공지영 소설 이후 약 8개월만에 한국 작가의 소설이 연일 베스트 셀러에 올라 화제를 낳고 있다.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성안에 갇힌 임금과 신하, 신하끼리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인간적인 미묘한 갈등, 그리고 백성들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소설로 김훈 특유의 글솜씨가 독자의 가슴을 죄게하고 실전을 보는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한국의산천-     

 

 

▲ 07:30분 산행시작. ⓒ 2007 한국의산천

 

성남시 수정구 민속공예전시장에서 출발. 남문까지는 약 50분 소요.

 

 신록이 짙어져 가는 초하(初夏)에 소설속의 그 길을 걷고있다. 눈보라가 마룻바닥까지 들이치는 곳에 계신 인조임금 그리고 청음 김상헌과 지천 최명길 선조를 떠올리며.   
 
▲ 남한산성 안내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 2007 한국의산천

 

택리지를 보면 여주다음으로 광주가 소개되고 있다.

 

여주 서쪽은 광주(廣州)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쭉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성안은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었다. 또 중요한 진(鎭)이므로 만약 사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전투가 벌어질 지형이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 되었기 때문이다. - 택리지에서-

 

 


 


 
▲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여기까지 약 50분 소요

 

택리지의 기록처럼 남한산성은 광주,성남이요 성남하면 남한 산성이 떠오르는 곳이다. 남한 산성(사적 제 57호) 은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등을 지키는 4대 외곽 가운데 동쪽에 자리한 성으로 북한산성과 함게 도성을 지키는 남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남문에서 가까운 수어장대는 높은 위치에 목조건물로 우뚝 세워져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조선 16대 왕인 인조가 45일간을 머물면서 국사를 의논하고 군사를 격려하다가 삼전도에 나아가서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를 했던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못할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1636년 청나라는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로운 군신관꼐를 맺으며 공물과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과 화친을 끊자, 1636년 12월 1일 청태종은 1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질풍노도처럼 밀고 내려왔다.

이에 다급한 조정에서는 별 준비없이 종묘 사직의 신주만 챙켜들고 강화도로 피신을 하려 하였으나 날이 추워서 눈길에 말(馬)이 미끄러지고, 적이 파주에 당도하자 하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얼음이 얼어있는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 남한산성 내에 지형이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수어장대(서장대)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前) 좌, 중, 우,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陣)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오면 성은 밟혀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열려서 끝나나 밟혀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름이 없다.  ※  칸(Khan) : 중앙아시아 제국 통치자의 존칭.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 수어장대 아래에 있는 휴식처 ⓒ 2007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서문으로 가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수어장대에서 간단히 간식을 하고 다시 내려와 아주 좁은 암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온다음 서문으로 향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굴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 성외곽 서문으로 가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 칸에게 치욕과 수모를 당한 서문 ⓒ 2007 한국의산천  

 

살을 에는듯한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월. 城안의 말 먹이는 동이난지 오래며, 한마리 두마리 허연 콧바람을 내뿜으며 허덕이다 쓰러지고, 성을 지키는 병졸은 가마때기 한장 없이 눈보라를 맞으며 통나무 쓰러지듯 하나 둘 스러져갔다. 지금으로부터 꼭 370년전 이곳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 서문 (西門)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하기위해 인조임금은 삼전도를 향해 길을 나섰다. 청나라의 칸은 말했다. 나를 보러 올때는 남문을 이용하지 말고 서문을 이용해야 한다.  남문이 남한산성의 정문 역활을 하였으며, 서문은 홍예문의 높이가 낮으며 문을 나서면 급경사를 이루고 있기에 말을 타고 내려 갈 수 없는 험난한 곳이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야 했고 세자와 같이 걸어서 내려왔다. 

 

 

 

▲ 해발 465m의 연주봉 옹성ⓒ 2007 한국의산천

 

연주봉까지 이어지는 멋진 옹성, 북쪽으로는 송파.동쪽으로는 검단산과 남한산 벌봉이 한눈에 들어오는곳이다.

 

 

 

▲ 북장대지 가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 城은 성에 연하여 굽이 굽이 이어지고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일주는 성의 안쪽이나 외곽을 따라 돌면 된다. 교차하여 따라 돌면 더욱 좋다.

  

 

  

▲ 산성내 이정표는 잘되어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멀리 보이는 지나온 청량산과 연주봉 ⓒ 2007 한국의산천  

 

▼ 앞으로 가야 할 멀리 보이는 벌봉 ⓒ 2007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일주는 산성에서 5m 이상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성길은 연이어 진다. ⓒ 2007 한국의산천 

 능선 아래로 이어져 있는 길도 겹친 산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린다. 

 

 

▲ 날이 더워 힘이 들때는 파란 하늘을 보고... ⓒ 2007 한국의산천

 

 

▲  멀리 보이는 산성내 중앙에 위치한 식당촌 ⓒ 2007 한국의산천

 

 

▲ 선조의 지혜가 담긴 특이하게 생긴 암문도 몇군데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동장대로 이동중 급경사 지역 ⓒ 2007 한국의산천

 

 

▲ 피로를 풀어주는 예쁜꽃이 피어있네  ⓒ 2007 한국의산천

 

 

▲ 동장대 암문 ⓒ 2007 한국의산천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야 벌봉(515m) 에 갈수가 있다. 벌봉에서 남한산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한다. (약 1시간 소요)

 

 

▲ 벌봉의 바위 ⓒ 2007 한국의산천

 

 

 

▲ 벌봉의 작고 뾰족한 바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봤다. ⓒ 2007 한국의산천 

벌봉(봉암 515m)에 올라서면 사방이 일망무제로 막힘이 없이 조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벌봉이라는 이름은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마치 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있어서 침략하면서 즉시 깨트리면 성을 함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청군이 이 바위에 올라 성내를 관찰하고 공격을 하였다.

 

 

▲ 벌봉에서 훤하게 바라 보이는 남한산성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 벌봉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검단산과 오른쪽으로 이어진 용마산  ⓒ 2007 한국의산천  

검단산 왼쪽 뒤로 예봉산이 보인다.

 

 

▲ 축성 그대로의 모습 남한산성 ⓒ 2007 한국의산천 

 

 

 ▲ 동문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 정오무렵 햇살은 매우 따갑다. ⓒ 2007 한국의산천   

 

 

▲ 동문으로 가기 전에 있는 장경사 ⓒ 2007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동문 ⓒ 2007 한국의산천 

이곳에서 도로가 나오며 도로를 가로지러 급경사의 성곽을 따라 제3 남옹성으로 이동.날은 덥고 경사가 매우 급했다.

 

 

▲ 남문으로 이동중 푸른하늘 흰구름  ⓒ 2007 한국의산천 

 

 

▲ 보수 중인 남장대지 앞의 성문  ⓒ 2007 한국의산천 

 

 

▲ 검단산이 바로 앞에 보이는 제2 남옹성을 지나며 ⓒ 2007 한국의산천 

 

 

 

 ▲ 출발지로 다시 돌아온 남문(지화문)  ⓒ 2007 한국의산천  

 

 

▲ 남문을 빠져나와 백련사 코스를 따라 하산중 만난 계곡의 어린이들  ⓒ 2007 한국의산천 

 

 

▲ 많은 인파가 붐비는 남한산성 계곡 (오후 1시 20분경)ⓒ 2007 한국의산천 

 

 

▲ 등산 출발지 성남시 민속공예 전시장 앞 ⓒ 2007 한국의산천  

 

 

▲ 하얀 눈이 쌓이고 그 위에 눈이 또 쌓이는 깊은 겨울에 다시 이곳을 찾으리. ⓒ 2007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 지도(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 2007 한국의산천  

 

▲ 삼전도 비 

병자호란 때, 인조정권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항전하다 결국 항복했다. 

송파구 삼전도에서 항복의례를 행했다. 그 때 세운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다. 

청나라 만주글, 몽골글, 한문 3개 국어로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쓰러져 있는 것을 일제가 바로 세운 것이다.

 

 

김상헌은 최명길이나 인조보다도 오래 살았다. 

1652년(효종 3년)에 죽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낙향했는데, 오랑캐에게 굴종한 조정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최명길은 친구 장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조선의 신하입니다. 나의 나라, 나의 임금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월진(越津, 나루를 건너고 배를 탄다는 뜻으로, 앞뒤가 바뀌었다는 뜻)의 혐의가 없지 아니합니다…(중략)…조선의 신하는 명나라를 위하여 내 나라를 망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땅한 의리로서,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도 부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김상헌 선생은 이 의리에 어둡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6년 후인, 1643년(인조 21년), 최명길은 청나라로 압송됐다. 

비밀리에 명나라 정부와 연계를 추진하다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의 기세가 막강하긴 했지만 한족의 정통왕조인 명나라가 그리 쉽게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종국에는 ‘남송-금’과 같이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원을 양분하는 선에서 전선이 고착되리라는 것이 최명길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고려가 금나라와 남송에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입지를 확보했듯이 조선도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명나라는 내부의 분열과 농민 반란으로 스스로 무너져버렸고, 이 과정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대신 홍승주가 명과 조선의 비밀 교섭을 폭로한 것이다. 

 

최명길은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투옥됐다. 그런데 이 때 최명길은 심양의 감옥에서 김상헌과 조우한다. 김상헌은 청나라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로 지목되어 먼저 끌려왔던 터였다. 감옥 안에서 두 사람은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풀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자신의 명분만 고집한다는 편견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의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었고,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한 편이 되려 한다는 오해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심 어린 선택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방법론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최명길이 “끊는 물과 얼음물이 모두가 물이요/ 갓옷과 베옷 또한 옷 아님이 없으니/ 일은 혹 때에 따라 달라질지라도/ 마음이야 어찌 도에서 어긋나겠는가?”라고 하자, 김상헌은 “권도는 현인조차도 잘못 쓸 수 있으니/ 경도로 대응해야 사람들이 어기지 못할 것이다/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 하노니/ 조차간에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게”라고 답한 것이다. 자신이 권도를 따른 것은 변화된 상황에 부응하기 위한 것일 뿐, 그 마음만큼은 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최명길의 말에 김상헌은 권도를 추구하지 말고 경도에 충실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최명길은 1645년 소현세자, 김상헌, 이경여 등과 청에서 풀려나 귀국한다.


김상헌은 충절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가문은 교목세가(喬木世家,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집안)라고 불렸으며, 후손들도 그 후광을 입었다. 손자 대에만 영의정 2명(김수흥·김수항)이 나왔고, 7대손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다. 이에 비해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은 비록 영의정에 오르기는 했지만 “화의를 주장한 최명길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의 독자들과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소설의 마지막에 '남한산성에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썻다가 지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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