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또 산으로
산행을 마치고
『그냥 가기 뭣하면
중간에 안국사지(安國寺址)쯤에 들러
크고 못생긴 보물 고려 불상과 탑을 건성 보고....』(황동규 -소유언시中)
산행코스 (서산 가야산~ 일락산 약 14km. 원점회기 산행)
용현리 고풍 저수지 - 용현마애삼존불상 - 능선 - 수정봉 - 옥양봉 - 석문봉 - 사잇고개 - 일락산 - 개심사 - 보원사지
▲ 서산 가야산 석문봉(2005년 6월) ⓒ2007 한국의산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내포란 지금의 예산·서산·홍성·당진 지방과 태안·아산 일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을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하면서 내포의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놓여있다고 적고 있다.
가야산
합천의 가야산과 同名異山(동명이산)인 서산 가야산(677.6m)은 칠갑산에서 북진하는 금북정맥 상에 솟아 있다. 금북정맥은 홍성을 지나 삼준산을 빚어 놓은 다음, 노적봉 - 가야산(일명 가사봉) - 석문봉 - 옥양봉을 들어올리고는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은 일락산을 들어올린 후 서산 앞바다로 가라앉고, 옥양봉에서 북동으로 달아나는 산릉은 상왕산을 빚어 놓고, 그 여맥을 당진 평야에다 묻는다.
가야산은 예산군과 당진군, 서산군 등 3개 군에 걸쳐 들판에 우뚝 솟아 산세가 당당하고 곳곳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은은한 풍경을 자아낸다.
예로부터 가야산은 호서지방 제일의 명산으로 꼽던 곳이다. 백제 때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불교가 정착한 곳이며, 불교 전성기에는 이 산 일대에 아흔아홉 암자를 거느린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야산 최고봉 가사봉은 충남의 해안에 솟은 산 중 오서산 다음으로 높다. 주변에 시야를 막을 만한 높은 산이 없어 조망이 뛰어나고 일몰 경치 또한 멋지다. 하지만 최고봉인 가사봉(袈裟峰)은 현재 여러 통신시설물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오를 수 없다. 대신 가사봉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능선에 솟은 석문봉(石門峰·653m)이 가야산의 정상을 대신한다.
예부터 이곳 주민들은 석문봉을 주봉으로 해서 생각해 왔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와 가야사터에 맥을 대고 있는 봉이 바로 석문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산 산행은 남연군 묘가 있는 상가리에서 옥녀폭포가 있는 일조암계곡을 경유하여 석문봉을 오르내리는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산행코스에 변화를 주기 위하여 일조암계곡으로 석문봉에 오른 다음에는 서산 들판이 시원하게 터지는 북동릉을 타고 옥양봉에 이른 다음, 쉰길바위 능선을 경유하여 다시 남연군묘 앞으로 내려서기도 한다.
정상 돌탑에서 남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물이 맑고 계곡이 좋은 용현 계곡으로 하산 할 수 있다 (현재 용현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있다)
주변에 개심사, 일락사, 보덕사, 원효암등 백제초기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사찰들과 해미읍의 명소로 이름난 해미읍성, 홍성 면천읍성이 있다.
최근 들어서는 개심사쪽에서 서산목장을 거쳐 마애삼존불과 보원사 - 수덕사 - 덕산온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시원하게 뚫려 가야산을 한 바퀴 돌면서 가야산의 진면목을 구석구석 볼 수 있게 됐다. 용현계곡 총연장 4km의 남짓한 도로를 따라가면 산과 수려한 계곡이 이어지고, 계곡입구마다 빠짐없이 들어서 있는 저수지와 산 위쪽에 위치한 절들이 정취를 더한다.
▲ 가야산 일락산 지도 ⓒ2007 한국의산천
석문봉 산행은 북쪽 용현계곡에 조성된 용현 자연휴양림과 연계할 수 있다. 정상 북쪽 25분 거리의 사잇고개까지 임도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임도를 이용하면 초보자도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다. 물론 남연군묘 방면의 인기 코스에 비하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임도 경유시 1시간30분, 옥양폭포 계곡길 이용시 1시간 소요).
석문봉 정상의 바위지대인 문다라미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송낙바위 능선이 땅과 닿은 곳이 1,400여 년 전에 개창된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던 자리다. 이곳은 옥양폭포가 있는 일조암계곡과 상가저수지가 있는 계곡이 합수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명당자리에 남연군묘가 있는데, 덕산온천 방면에서 접근이 편리해 석문봉을 찾는 등산객들 대부분이 이곳을 기점으로 원점회귀산행을 즐긴다.
남연군묘에서 석문봉에 오르는 코스는 크게 세 가닥이다. 옥양폭포가 있는 일조암 계곡을 통해 정상으로 직등하는 코스, 남연군묘에서 북서쪽 쉰길바위와 옥양봉을 경유해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 그리고 남연군묘에서 상가저수지~계곡 합수점 쉼터~남릉 삼거리(609m봉 남쪽)를 경유하는 코스 등이 그것이다.
이중 옥양봉을 경유해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상가리 버스종점에서 5분쯤 가면 남연군묘 입구 삼거리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 10분쯤 가면 등산로 개설기념비가 있는 갈림목에 닿는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은 일조암계곡이고, 오른쪽이 옥양봉 코스다. 오른쪽 길을 통해 약 20분 오르면 관음사 입구가 보인다.
관음사 입구에서 왼쪽 급경사 길로 5분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밧줄이 걸려있다. 줄에 의지해 급경사 암벽을 15분쯤 오르면 쉰길바위 정상부다. 쉰길바위 꼭대기에서 능선길을 조금 더 가면 옥양봉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석문봉을 보고 15분 가량 내려서면 안부에 닿는다. 능선길로 602m봉을 오른 뒤 잠시 내려가면 옥양폭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다. 석문봉 정상은 삼거리에서 300m 정도 더 올라야 한다. 남연군묘에서 쉰길바위와 옥양봉을 거쳐 정상까지 거리는 약 5km로, 2시간30분~3시간이 소요된다. 이 코스를 통해 석문봉을 올라 낙조를 보려면, 최소한 일몰 3시간 반 전에는 버스종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석문봉에서 일몰을 본 뒤, 옥양폭포 코스를 이용하면 하산 거리가 가장 짧다. 하지만 능선에서 내려서는 길이 상당히 가팔라 야간산행에 익숙치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 정상에서 옥양폭포를 거쳐 남연군묘까지는 약 3.5km로, 하산에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석문봉 북쪽의 사잇고개를 통해 임도로 내려서면 용현 자연휴양림 방면으로 내려설 수 있다. 2005년 개장한 이 휴양림은 일락산과 옥양봉 능선 사이의 청정지역인 용현계곡에 조성되어 있다. 휴양림으로 들어서는 계곡 초입에 마애삼존불상과 보원사지가 자리해 역사교육현장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이다(안내전화 031-664-1978).
숙박 지역번호(041)
용현 자연휴양림은 인터넷(http://www.huyang/. go.kr)을 통해 예약해야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용현계곡 입구 마애삼존불상 부근에 민박집이 밀집해 있다. 용현집민박(663-4090), 강댕이집(663-3543), 용천골민박(669-3819), 예원가든(669-2353), 서울가든(664-6336), 가든마애(663-1313), 향토마당(664-8893), 송산가든(669-7803), 신선동가든(669-3392), 청솔가든(669-6716), 푸른가든(664-1715) 등에서 식사와 민박이 된다.
가야산 일락산 주변 유적지
삼존 마애불상
▲ 서산 삼존 마애불상 ( 운산 용현리 ) ⓒ2007 한국의산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어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지며 빛과의 조화에 의하여 웃는 모습도 다양하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보살입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가여래입상은 머리뒤의 보주형 광배와 미간의 백호공, 초생달같은 눈썹, 미소짓는 그 입술은 매우 친근감을 주고 있으며, 또한 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호선으로 길게 주름져 있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곳에서 용현계곡을 따라 약 2km 정도 올라가면 보원사지가 나온다.
보원사지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운산면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다가 작은 삼거리에서 골짜기를 타고 길게 이어진 산속호수(고풍 저수지)의 옆도로를 타고 10여분 정도 달리면 조그만 다리를 건너 용현계곡 입간판을 볼 수있다.그곳으로 들어서면 골짜기의 돌무더기 위에서 목을 지키듯 눈을 부라리고 있는 돌 미륵을 만난다.
보원사지는 사적 제 316호로 서산면 운산면 강당리계곡에 위치해있다. 보원사는 백제말기 창건 고려초에 중창된 웅장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보원사지가 위치한 강당계곡의 특징은 높은산(가야산,일락산, 상왕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계곡으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고풍리(현재의 저수지 자리,계곡입구)를 무릉도원이라고 하였다. 입구의 좁은계곡을 복숭아 꽃잎을 따라 들어가면 별천지와 같은 마을이 전개되기때문이다.
골짜기 안에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84호)과 100여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천년 사찰 보원사터가 있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은 어디 한곳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작품이나 최근들어 바위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균열을 나타내는 백화현상이 나타나 문화재청 등이 붕괴를 막고 영구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마애불은 여전한 미소로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마애불을 지나 약 800m정도 더 골짜기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백제의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보원사터가 나온다.
지금은 문화재 보존을 위해 일체의 행위가 금지된 채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넓은 옛 절터는 정확히 언제 세워졌다가 어느 시기에 쇠락해 풀밭으로 변했는지 알지 못한다. 일설에 의하면 보원사는 고려 때부터 호국불교의 본산으로 고려때 원나라 간섭기와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을 키워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고는 했다가 마침내 왜적들에 의해 수백칸이 넘는 절집이 몽땅 불에 타 하루아침에 없어졌다고 한다.
용현리 골짜기 초입의 미륵불을 받치고 있는 돌무더기는 당시 몽고군과 왜병들에 맞서 석전을 할 때 사용하던 돌더미라고 전한다.
마애삼존불상에서 약 1km의 거리에 위치한 보원사지는 사적 제 316호로 고려초에 창건한 사찰로서 고승 법인국사가 수도하였다 한다. 이곳에 현존하는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상당히 성세했던 사찰로 추정되고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백제계의 양식기반 위에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고루 갖춘 5층석탑과 통돌을 장방형으로 만든 석조, 고려 경종3년(978)에 법인국사의 제자들이 그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만든 보승탑,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비 및 큰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행사기를 다는 당간을 세우기 위해 만든 화강석의 당간지주를 볼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보원사지 석조
보물102호.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내부 각면에는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8cm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 알수 없다.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4톤의 물을 저장할수 있을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높이 65cm 길이 384cm 폭 175cm
▲ 보원사지 ⓒ2007 한국의산천
▲ 보원사지 당간지주 ⓒ2007 한국의산천
신라 말∼고려 초에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북쪽에 있던 절터이다. 이곳에 있던 절을 강당사 라고도 하였다.
현재 건물은 없고 아주 넓은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보물 102), 당간지주(보물 103), 5층석탑( 보물 104), 법인국사보승탑(보물 105호 ),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106) 등과 그 밖에 쇠로 만든 불상이 있다.
수당리 석불입상
▲ 수당리 안국사지 보물 100호인 석불입상과 그 뒤의 배바위 매향암각 ⓒ2007 한국의산천
안국사지는 당진읍에서 서남쪽으로 10.5km 떨어진 정미면 수당리 원당굴 은봉산 중턱에 있는 절터이다.
안국사지 석불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채석장을 끼고 올라가면 1,000여평의 터가 남아있다.
창건연대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않아 분명치 않으나 백제 말엽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번창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석불, 석탑, 석축, 배바위돌 하수구 등이 현존하여 대사찰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해미읍성
▲ 해미읍성 남문 ⓒ2007 한국의산천
▲ 성안 ⓒ2007 한국의산천
▲ 해미읍성 안에 있는 호야나무 ⓒ2007 한국의산천
조선말 천주교 탄압이 이뤄지던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서 순교했다. 당시 관아가 있던 이 곳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수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는 1,000여 명이 처형됐다. 성 안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신자들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모진 고문을 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 해미읍성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미성지 ⓒ2007 한국의산천
▲ 개심사 대웅전 ⓒ2007 한국의산천
개심사 대웅전(보물 제 143 호)
개심사는 가야산 (677.6m) 줄기의 상왕산 (307.2m) 기슭에 자리잡은 고사찰로 문헌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확실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개심사에 전해지는 사적지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14년 (65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충정왕 2년 (1350)에 처능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심사의 본전인 현재 대웅전 건물의 건축연대는 성종실록 56권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 6년 (1475)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이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 개심사가 연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4년 대웅전 해체 보수 당시에 마루도리 받침 장혀속에서 "조선 성종조성화 이십년 갑진 6월 대웅전 중창"이란 묵서명이 발견되어 현재의 대웅전은 성종 6년에 화재로 소실 된 것을 9년이 지난 성종 15년 (1484)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개심사의 경지(鏡地) ⓒ2007 한국의산천
개심사가 자리한 상왕산은 코끼리를 뜻하며 코끼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옥빛을 띤 연못을 저 좁은 통나무 다리를 통해 건너면 마음이 가벼워 질것 같은 느낌이...
남연군의 묘
▲ 남연군 묘 ⓒ2007 한국의산천
남연군의 묘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로 이 남연군묘가 위치한 자리는 본래 가야산 일대에서 제일 큰 절인 가야사(伽倻寺)는 99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절이었던 가야사를 불사르게 하고 금탑을 허물게 하여 이 묘자리를 차지하였다.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가 웅장하게 뻗어있던 “이대천자지지”즉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수 있는 곳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왕권에 야심을 품고 안동 김씨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어 오던 터라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 묘자리에는 뒷날의 도굴을 염려하여 철 수만근을 붓고 강회로 비벼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조물 2조의 석양과 2기의 석주를 묘의 좌우에 세우고 있으며 묘 앞에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장 후 예언대로 철종 뒤를 이어 12세로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순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 돌아서있는 석불 ⓒ2007 한국의산천
남연군 묘 앞 길건너에는 돌아서있는 미륵불이 있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사르고 금탑을 깨부순 데 대해 괘씸하다며 항의조로 돌아서버렸다는 설과 풍수지리설상으로 기운을 조화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문화재 자료 제182호. 일반적으로 미륵불로 불리나 학명으론 관세음보살이다.
시인 황동규님의 시 "소유언시"를 읽다보면 서산의 명소가 곧잘 등장한다.
소유언시(小遺言詩)
- 황동규-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 원효
1
살기 점점 더 덤덤해지면,
부음(訃音)이 겹으로 몰려올 때
잠들 때쯤 죽은 자들의 삶이 떠오르고
그들이 좀 무례하게 앞서갔구나 싶어지면,
관광객도 나대지 않는 서산 가로림만(灣)쯤에 가서
썰물 때 곰섬(熊島)에 건너가
살가운 비린내
평상 위에 생선들이 누워 쉬고 있는 집들을 지나
섬 끝에 신발 벗어놓고
갯벌에 들어
무릎까지 뻘이 차와도
아무도 눈 주지 않는 섬 한구석에
잊힌 듯 꽂혀 있다가
물때 놓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하듯이.
2
그냥 가기 뭣하면
중간에 안국사지(安國寺址)쯤에 들러
크고 못생긴 보물 고려 불상과 탑을 건성 보고
화사하게 핀 나무 백일홍들
그 뒤에 편안히 누워 있는 거대한 자연석(自然石) 남근을 만나
생전 알고 싶던 얘기나 하나 묻고
대답은 못 듣고.
3
길 잃고 휘 둘러가는 길 즐기기.
때로 새 길 들어가 길 잃고 헤매기.
어쩌다 500년 넘은 느티도 만나고
개심사의 키 너무 커 일부러 허리 구부린 기둥들도 만나리.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한 새들도 있으리.
혹시 못 만나면 어떤가.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
나무, 집과 새들을 만났다.
이제 그들 없이 헤맬 곳을 찾아서.
4
아 언덕이 하나 없어졌다.
십 년 전 이곳을 헤매고 다닐 때
길 양편에 서서 다정히 얘기 주고받던 언덕
서로 반쯤 깨진 바위 얼굴을 돌리기도 했지.
없어진 쪽이 상대에게 고개를 약간 더 기울였던가.
그 자리엔 크레인 한 대가 고개를 휘젓고 있다.
문명은 어딘가 뻔뻔스러운 데가 있다.
남은 언덕이 자기끼리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날의 갖은 얘기 이젠 단색(單色) 모놀로그?
5
한 뼘 채 못 되는 시간이 남아 있다면
대호 방조제까지만이라도 갔다 오자.
언젠가 직선으로 변한 바다에
배들이 어리둥절하여
공연히 옆을 보며 몸짓 사리는 것을 보고 오자.
나이 늘며 삶이 점점 직선으로 바뀐다.
지난 일들이 빤히 건너다보이고.
6
곰섬 건너기 직전
물이 차차 무거워지며 다른 칸들로 쫓겨다니다
드디어 소금이 되는 염전이 있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든 억지로든
칸 옮겨 다님,
누군가 되돌아가지 못하게 제때마다 물꼬를 막는다.
자세히 보면
시간에도 칸들이 쳐 있다.
마지막 칸이 허옇다.
7
물떼샌가 도요샌가
긴 발로
뻘에 무릎까지 빠진 사람은
생물로 치지 않는다는 듯이
팔 길이 갓 벗어난 곳에서 갯벌을 뒤지고 있다.
바지락 하나가 잡혀 나온다.
다 저녁때
바지락조개들만
살다 들키는 곳.
8
어둠이 온다.
달이 떠오르지 않아도
물소리가 바다가 된다.
밤새가 울 만큼 울다 만다.
왜 인간은 살 만큼 살다 말려 않는가?
생선들 누웠던 평상 위
흥건한 소리마당 같은 비릿함,
그 냄새가 바로 우리가 처음 삶에,
삶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 자리!
그 속에 온몸 삭히듯 젖어
육십 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이 멈출 길 없는 떠남! 내 안에서 좀체 말 이루려 않는
한 노엽고, 슬거운 인간을 만난다.
곰처럼 주먹으로 가슴 두들기고
밤새처럼,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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