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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봉원사에 숨은 비밀

by 한국의산천 2021. 9. 29.

정말 추사는 名筆 이광사 현판을 떼버리라고 했을까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4. 봉원사에 숨은 비밀② 명필 원교와 추사에 얽힌 왜곡된 전설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도 대웅전 현판인 ‘대웅보전’(사진)은 원교 이광사가 썼고 ‘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서울 봉원사에 가면 두 명필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글씨를 볼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은 이광사, 대방(大房)에 있는 현판 두 개는 김정희 글씨다. 

 

세간에서는 제주 유배길에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이광사 글씨를 깎아내리며 떼라고 했다가 유배 후 성숙해진 마음으로 그 글씨를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혀 근거가 없다. /김영근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9.29 03:00

서울 봉원사는 원래 지금 연세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1752년 영조가 그 자리에 사도세자 아들인 손자 의소세손 묘를 쓰면서 지금 안산 기슭으로 이건됐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봉원사를 ‘새절’이라고 불렀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도 “새절에서 개화승 이동인을 만났다”라고 했고(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p83~85) 1970년대까지 주민들도 ‘새절로 소풍 간다’고 했다.

영조 때 왕찰이었던 사찰인지라 크고 작은 권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이 절 명부전(冥府殿) 현판을, 조선 망국 대신 이완용은 명부전 주련(柱聯) 글씨를 남겼다. 

대원군 옛 별장 아소정(我笑亭)을 이건한 대방(大房)에는 흥선대원군 스승 추사 김정희 흔적이 남아 있다. 김정희 현판 두 개, 김정희 스승인 청나라 학자 옹방강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추사 현판 가운데 행서로 쓴 ‘珊糊碧樹(산호벽수)’를 봉원사는 ‘珊糊碧樓(산호벽루)’라 소개하고 많은 이 또한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산호벽수’는 ‘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서로 잘 어울려 융성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제일 큰 법당인 대웅전에 걸린 ‘大雄殿(대웅전)’ 현판 필자는 원교 이광사다. 추사가 졸필(拙筆)이라고 맹비판한 추사 선대(先代) 명필이다. 이제 이 이광사와 김정희에 얽힌, 사실로 굳어버린 전설 혹은 괴담(怪談)을 알아보기로 한다.

대웅전 현판(원교 이광사)


[박종인의 땅의 歷史]274. 봉원사에 숨은 근대사 비밀② 명필 원교와 추사에 얽힌 왜곡된 전설
해남 대흥사, 원교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역모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를 간 1840년 이야기다.

‘전주⋅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 기개가 살아 있어, 대흥사 현판 글씨들을 비판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추사는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1848년 12월 63세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 창비, 2018, p128, 129)

위 내용은 같은 저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 1993, p88~89)와 ‘완당평전’ 1권(학고재, 2002, p337~338), 2권(p517~518)에 동일하게 실려 있다. ‘완당평전’ 후 유홍준이 새로 낸 김정희 평전 ‘추사 김정희’(창비, 2018, p242, p355~356)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홍준은 이렇게 평했다.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다.’(‘산사순례’(2018), p130)

자신만만 오만방자하던 50대 김정희와 그 필체가 귀양살이 후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말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모든 매체는 이를 자기계발과 성숙을 말하는 글 소재로 삼아 글을 써왔다. 그런데 결론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허구(虛構)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추사 김정희 편액 ‘無量壽閣’.


천하명필 원교 이광사


소론인 이광사는 노론이 판치던 영조 때 몇 가지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전남 완도 신지도로 유배 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영조 31년 ‘형(경종)을 죽이고 왕이 된 역적 영조’라는 대자보가 나주 객사에 걸린 ‘나주 괘서 사건’이 터졌다. 

 

수사 과정에서 이광사 이름이 튀어나왔다.(1755년 3월 6일 ‘영조실록’) 그가 체포된 직후 자결을 결심했던 아내 문화 류씨는 엿새 뒤 남편이 처형됐다는 유언비어에 목을 매고 죽었다.(이광사, ‘원교집’ 권7, ‘망실 유인 문화류씨 묘지명(亡室孺人文化柳氏墓誌銘)’), 

죽지 않은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당했다. 그때 이광사는 “뛰어난 재주가 있으니 원컨대 목숨은 살려달라”고 청해 사형을 면하고 유배형을 받았다.(이규상(1727~1799), ‘병세재언록’, 민족문학사연구소 역, 창작과비평사, 1997, p127)

그 뛰어난 재주가 글씨였다. 명필이었다. 그래서 부령 유배지에서 ‘지방인들을 많이 모아 글과 글씨를 가르치자’(1762년 7월 25일 ‘영조실록’) 다시 전남 진도로, 신지도로 떠돌며 유배 생활 끝에 죽었다. 신지도 시절에도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 글씨를 받아갔다.


봉원사 명부전. 현판은 정도전, 기둥에 있는 주련은 이완용 글씨다.


웬만한 남도 큰 절에는 이광사 글씨로 쓴 현판들이 걸려 있다.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구례 천은사가 대표적이고 서울 봉원사도 그중 하나다. 

 

영조를 역적이라 칭한 역적 글씨가 영조가 왕찰로 삼은 봉원사 대법당에 걸려 있으니 아이러니다. 그 간난고초 속에서도 이광사는 ‘서결(書訣)’이라는 서법 책을 남겼고, 그 모든 고초와 비극을 목격한 아들 이긍익은 역사서 ‘연려실기술’을 기술했다.

후배 천하명필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외가 후손이다. 집안은 노론이다. 청나라에서 신문물을 배운 김정희는 이광사와 전혀 다른 필법으로 새 명필 반열에 올랐다. 이광사는 1777년에 죽었고 김정희는 1786년생이니 본 적은 없다.

그런 그가 이광사 필법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온통 미혹(震耀‧진요)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니,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는구나. 원교는 천품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재주만 있고 배움은 없었다(其天品超異 有其才而無其學‧기천품초이유기재이무기학).’(김정희, ‘완당전집’ 6권 ‘원교필결 뒤에 쓰다(書圓嶠筆訣後‧서원교필결후)’) 금석학과 역대 중국 필법을 연구한 추사였다. 

 

조선에 얽매인 원교 글씨가 그에게는 촌스럽게 보였고, 게다가 반(反)영조 세력인 소론 이광사를 명필로 칭송하는 세상이 이 명문 노론에게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추사의 유배와 곤장 36대


그 추사가 1840년 8월 한 역모에 연루돼 수사를 받았다. 김정희는 의금부에 체포돼 다른 공범 혐의자들과 함께 고문을 받았다. 고문 방식은 신장(訊杖), 널찍한 몽둥이로 패면서 심문하는 방식이었다. 피의자 생명에 치명적인 고문이라, 조선은 개국 초부터 신장은 한 번에 30번을 때리지 못하고 한 번 신장을 때린 뒤에는 사흘 뒤에야 다시 때릴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1417년 5월 11일 ‘태종실록’, 1511년 4월 11일 ‘중종실록’ 등)

그래도 심문 도중 물고(物故‧맞아 죽음)되는 사례가 빈번하자 정조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만들어 몽둥이 규격을 정했다. 고문 수사를 할 때 쓰는 몽둥이는 길이 105㎝(3척5촌·1척=30㎝ 기준)에 손잡이는 길이 45㎝(1척5촌), 지름 2.1㎝(7푼)이며 매를 때리는 부분은 길이 60㎝(2척)에 너비는 2.7㎝(9푼) 두께는 1.2㎝(4푼)였다.(1778년 1월 12일 ‘정조실록’) 때리는 방법은 ‘엄중(嚴重)하게.’(‘속대전’ 형전 ‘형신추국(刑訊推鞫)’)

그 신장을 김정희는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서른여섯 대를 맞았다. 1840년 8월 23일 5대, 다음 날 7대, 25일 3대, 29일 5대, 30일 7대 그리고 9월 3일 9대.(1840년 8월 23일~9월 3일 ‘일성록’‧석한남,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가디언, 2017, p99~100, 재인용) 오늘내일 상간으로 김정희는 물고될 처지였으나 우의정 조인영의 청원에 목숨을 건지고 제주 유배형을 받았다.(1840년 9월 4일 ‘헌종실록’) 함께 신장을 얻어맞으며 심문당하던 김양순은 4차례에 걸쳐 신장 61대를 맞다가 죽었다.(1840년 8월 27일 ‘헌종실록’) 그리고 김정희가 의금부 도사와 동행해 멀고 먼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형 가운데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 갇히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이었다.

고문 받은 몸으로 떠난 유배길
‘몸에 형구(刑具)가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습니다. 40일 동안 몸에 형구가 채워지고 매를 맞는 참독(慘毒)을 만났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김정희, ‘완당전집’ 3권,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4)

제주로 가려면 완도에서 배를 타야 한다. 제주에 도착한 후 김정희가 동생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김정희는 9월 27일 아침 완도에서 배를 타고 석양 무렵에 제주에 도착했다.

유배 죄인을 압송하는 관리들이 작성한 ‘의금부노정기’(연대 미상)에 따르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규정된 압송 기한은 13일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사항이다. 

 

1672년 현종 때 유배형을 받은 사간원 헌납 윤경교는 유배지에 7~8일 늦게 도착하자 처벌을 받았다.(1672년 8월 29일 ‘현종실록’) 경종 때 갑산으로 유배형을 받은 주청부사 윤양래는 도착이 이틀 늦었지만 ‘쉬지 않고 이동했기’ 때문에 처벌은 없었다.(김경숙,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호, 한국사학회, 1998) 그런데 김정희는 9월 4일 유배형을 선고받은 뒤 23일 만에 제주에 도착했다. 선고를 받고 늦게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당한 역적이 유배길을 이탈?


도착 기한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유배길,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떠난 유배길에서 경로를 이탈해 해남 산중 대흥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설사 갔다고 해도 대웅전 현판 필자를 비판하고 끌어내리며 자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같이 고문을 당했던 김양순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죄목은 역모였다. 쉬지 않고 걸어도 지체될 길에서 한가하게 친구 만나러 산중으로 들어갈 역모꾼은 없으리라. 그러니 8년 뒤 유배에서 풀린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현판을 다시 걸라고 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해남 대흥사 대웅전. 편액 '대웅보전'은 원교 이광사 글씨다. /김영근 기자


‘원교 글씨를 보니 웃음이 다 난다’


5년 뒤인 1853년 3월, 김정희가 북청으로 두 번째 유배를 갔다가 경기도 과천으로 돌아온 뒤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다행히 본 적이 있다(大雄扁圓嶠書幸得覽過‧대웅편원교서행득람과). 천박한 후배들이 비평할 바는 아니나 만약 원교의 자처한 바로 논하면 너무도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다. 그가 조맹부체의 덫 안에 추락해 있다는 말을 면치 못하겠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不覺哦然一笑‧불각아연일소).’(김정희, ‘완당전집’ 5권, ‘초의에게 보내는 편지’37)

대웅전 현판을 떼라고 했다는 언급은 없다. 다시 붙이라고 했다는 정신적 성숙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는 더한 자신감이 읽힌다. 

위 책 ‘완당평전’(2002)에는 ‘이 전설은 고증하지 않기로 한다’고 적혀 있다. ‘추사 김정희’(2018)는 이 에피소드를 ‘두 번째 전설은’이라며 전설로 전언(傳言)하고 있지만 이 책보다 뒤에 나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2018)에는 ‘전설’이라는 언급이 없다. 아름다운 사실로 굳혀버린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처음 알린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이 사실이 되는 거다. 굳이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 전설이 사실이 되었다. 봉원사, 대흥사에 가면 그 현판들을 꼭 일별할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땅의 역사

박종인 선임기자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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