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숲길 유력후보ㅣ② 지리산둘레길] 걷기길 대중화 촉발했던 순례·성찰의 길
글 박정원 선임기자 입력 2020.06.25 18:22
수천 년 한민족 애환 서려 있어…국가숲길 지정 전혀 손색없어
지리산둘레길 산청 예담촌 하천을 지나고 있다.
지리산만큼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산도 없을 듯하다.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어머니의 품과 같이 묵묵히 견뎌온 수천 년의 세월이 그대로 녹아 있는 산이다.
백두산이 민족의 성산이라면 지리산은 민족의 모산母山이다. 지리산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한민족 동족상잔의 비극의 격전지로서,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문화 융합지로서 자취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산이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알려진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와 함께 전래한 남방불교의 전래지로서의 흔적은 칠불사 등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삼국시대 오악 중 남악에 대한 자취는 지금도 구례 일대에 남아 있다.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서 기록은 전설과 함께 지리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는 지리산 산신으로 좌정해 불교를 융성시키고 국가를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지리산 곳곳을 오르내리며 유산록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최치원 같은 당대 최고의 선비는 지리산에 아예 숨어살며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지리산에서 은둔생활을 한 선비들이 어디 한둘인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남은 빨치산들은 지리산 일대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사망한 현대사의 비극은 지금도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같은 숱한 역사와 문화는 지리산이 아니면 지닐 수 없는 내용들이다.
산림청은 지난 2008년 지리산둘레길을 시범 개통했다. 한마디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단순히 걷기길 개통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이만한 반응을 보였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정서와 문화, 역사를 걷기길에서 함께 볼 수 있으니 그동안 쌓였던 폭발성을 가진 뇌관이 “빵” 터졌으리라 짐작한다.
하나의 현상은 일반화되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고 이후 어느 분기점을 넘어서면 가속화되는 경향을 띤다. 이른바 ‘티핑포인트 이론’이다. 지리산둘레길 이후 걷기길은 폭발성을 가지고 전국 곳곳을 터트렸다. 걷기붐이 일었다.
정부도 8개 부처에서 걷기 길 조성사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의미도, 내용도, 역사도 없는 예산만 낭비하는 길들이 전국에 난립하면서 걷기길이 퇴색하기 시작했다. 지리산둘레길 같은 길만 있었다면 아마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리산둘레길 상황마을에 있는 다랭이논 사이 둘레길을 걷고 있다.
2008년 20여 km 시범 개통한 지리산둘레길은 2009년 50km, 2011년 140km, 2012년 64km 등 해마다 개통 거리를 늘려 총 295km를 완성한 상태다.
사람들은 이를 ‘순례와 성찰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아무 길에나 순례와 성찰이라고 붙이진 않는다.
몇 년 전 산림청에서 지리산둘레길 종주자를 모집한 적이 있다. 일부 구간만 같이 걸으며 동행 취재했다. 그중 몇 사람을 인터뷰했다. “왜 이 힘든 길을 걷느냐”고 물었다.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 또는 한 번 걸어보려는 호기심 때문에’라는 답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돌아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돌아보기 위해서”와 “우리 땅의 자연과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건강을 위해서”라는 답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것도 30~40대 사람들이 이같은 대답을 했다. 의외였지만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순례와 성찰의 길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티아고순례길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지만 지리산둘레길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정서, 역사를 담은 길이다. 이같은 지리산둘레길은 국가숲길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매우 가치 있는 길이다. 국가숲길 1호와 버금갈 정도의 가치가 있다.
모내기를 위해 논에 쌓아둔 모판이 이색적이다.
295km, 700리길 완주 최소 2주 이상 걸려
때로는 숲으로, 때로는 마을로, 때로는 역사적 현장으로, 때로는 문화유산의 자취 속으로 들어가 감흥을 느끼면서 걷는다. 지리산 종주는 10여 차례 했지만 순례와 성찰의 길이라는 지리산둘레길은 아직 완주하지 못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고 남은 인생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 보기 위해서라도 둘레길을 한 번 돌아봐야겠다.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법률’ 제11조6 제1항에 나오는 국가숲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지역을 대표하는 숲길로서 산림·생태적 가치가 높은 것 ▲숲길과 연계된 그 주변의 산림·생태적 가치가 높아 국가차원에서 관리할 필요성이 있을 것 ▲지역을 대표하는 숲길로서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높을 것 ▲지역의 역사·문화자원과의 연계성이 높을 것 등에 해당하는 기준을 하나라도 갖춘 경우에 지정한다고 적시돼 있다.
지리산둘레길 함양 구간에 있는 전통적 다랭이논 옆으로 둘레길을 걷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DB
2항에는 숲길이 다음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규모를 갖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첫째 기준은 둘 이상의 시·도에 걸쳐 있는 숲길일 것, 둘째, 셋 이상의 시·군·구에 걸쳐 있는 숲길일 것, 셋째, 숲길의 거리가 50km 이상 될 것, 넷째, 3년간 평균 숲길 탐방객이 30만 명 이상으로서 국가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을 것 등이다.
백두대간 등산로 못지않은 가치가 지리산둘레길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295km, 흔히 700리 길이라는 지리산둘레길은 짧게는 보름, 길게는 3주 정도 잡고 쉴 새 없이 걸어야 한다. 마을마다 민박도 잘 조성돼 있어 숙식에 별 어려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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