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때도 바느질 안 놓았어요"… 87세 한국 패션 교육의 大母
김미리 기자 입력 2019.11.30 03:00
[아무튼, 주말]
패션학교 '에스모드 서울' 박윤정 이사장
박윤정 에스모드 서울 이사장이 학생이 만든 작품 옆에 섰다.
30년 전 손수 디자인한 테일러 재킷, 하얀 프릴 셔츠 차림. 여든일곱 나이가 무색하게 자세도, 머리칼도, 옷도 흐트러짐이 없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얘야, 나 죽으면 너 때문에 헝겊이 남아나질 않겠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딸 넷 시집보낼 때 쓰려고 쟁여둔 옷감을 빼내 바느질하는 셋째 딸을 보고 말씀하셨다. 그 어머니가 진짜 헝겊만 남기고 별안간 돌아가셨다.
"6·25 때 폭격을 맞아 집(서울 청진동)이 흔적도 없이 무너져 버렸어요. 집에 있던 어머니하고 큰언니가 건물 잔해에 깔려서 그만…." 박윤정(87) 에스모드 서울 이사장이 조용히 눈가로 티슈를 갖다 댔다. 70년 전 일이건만 슬픔의 여진(餘震)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유언과도 같은 어머니의 말은 예언이 됐다. 아이는 한국 패션 교육의 대모(大母)가 됐다. 1989년 프랑스 최초(1841년 개교) 패션 학교 '에스모드'를 들여와 서울 분교를 세웠다. 그사이 길러낸 패션 학도는 2300여명. 터줏대감처럼 30년간 압구정 입구를 지킨 에스모드 교정에서 박 이사장을 만났다.
일하느라 늙을 틈이 없었다
여든일곱 할머니가 말끔한 검정 테일러 재킷(칼라가 있는 재킷), 하얀 프릴(주름 장식)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30년 전 제가 디자인한 옷이에요. 학교 시작한 뒤로 옷 살 여유가 없었어요(웃음)." 자세도, 머리칼도, 옷도 흐트러짐이 없다.
―연세가 안 믿깁니다. 정정하시네요.
"이 나이 되어 보니 습관이 참 중요해요. 지금까지 하루하루 규칙적으로 일해요. 규칙이 쌓이니 절로 건강해졌어요. 그리고 꿈이 있는 한, 나이를 잊게 돼요. 꿈을 이룰 때까지 달려야 하니까 늙을 틈이 없어요."
―노화까지 막은 꿈이 뭐였습니까.
"달러 안 쓰면서 유학 간 것처럼 패션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었어요. 외국 학교 유치하려고 1980년대 말 전 세계 패션학교 안 가 본 데가 없었어요. 문전박대가 일상이었죠. 파리 에스모드에서도 처음엔 시큰둥했어요. 한국에 패션이 있느냐, 가봤더니 컬러 셔츠 입은 남자도 없던데 하면서요. 몇 년 공들여 겨우 들여왔어요. 의상실 하면서 번 돈 몽땅 넣어 학교를 세웠죠. 정작 문제는 한국이었어요."
―뭐가 문제였나요.
"에스모드가 3년제예요. 한국 학제와 안 맞는 거예요. 정식 대학이 아닌 학원으로 인가받았습니다. 지금 보면 제도권 밖에 있어서 우리가 하고 싶은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지만."
―한국 패션 위상이 달라졌지요?
"파리 본교를 놔두고 서울 분교로 유학 온 프랑스 학생까지 있을 정도예요. 연예 기획사가 K팝을 체계적으로 키워냈듯, 한국 패션이 더 크려면 우수한 신진 디자이너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패션 기획사가 필요해요. 그게 우리 같은 학교의 역할이지요."
포화 속에서 피어난 꿈, 디자이너
―옷이 언제 선생님 인생에 들어왔나요.
"예닐곱 살부터 인형 옷을 직접 만들었어요. 집에선 그러다 '옷쟁이' 되면 어떡하느냐 했지요. 여자들은 약대, 영문과만 쳐줄 때였으니. 1951년 집에는 약대에 원서 넣는다 해놓고선 가정대(이화여대 의상학과)에 입학했어요." 전쟁 피해 부산에 이화여대 임시 교사(校舍)가 있던 때였다. 포화 속에서도 '바늘'을 놓지 않았다. 실습 재료는 미군 원조 물품. 낡은 바지에서 단추 떼고 천 뜯어내 옷을 지었다.
첫 직장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가 운영하던 의상실. "남의 집 살이(노라노 의상실)가 쉽진 않더라고요(웃음)." 10년 가까이 일하고 1960년대 중반 뉴욕 메이어 패션학교에 입학했다. "그네들은 철저히 실무를 가르쳤어요. 언젠가 이런 학교를 한국에 만들겠다 마음먹었어요." 돌아와 1966년 충무로에 개인 의상실 '미스박 테일러'를 열었다. 70년 가까운 패션 인생 중 절반은 옷을 만드는 데, 절반은 옷을 가르치는 데 바쳤다.
―미스박 테일러란 이름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주변에서 여성복 하는데 왜 테일러(tailor·남성복 재단사)를 붙였느냐고 했어요. 테일러 재킷을 워낙 좋아했거든요. 가장 안 변하고 멋스러운 기본 스타일이니까. '미스박'이라 했다가 결혼하면 간판 바꿀 거냐는 사람도 있었지요. 결과적으로 결혼 안 해서 바꿀 필요도 없었지만(웃음)." 옷보다 강렬한 사랑은 없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배우 김지미씨가 열일곱 살 때부터 선생님 옷만 입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더군요.
"김지미씨 덕성여고 시절부터 옷을 해줬어요. 옛날에 김지미씨가 제가 만든 하얀 실크 슈트를 입고 해외에 갔어요. 공항 직원이 너무 멋있다면서 어디에서 했느냐고 묻더래요. 저희 집을 말해줬더니 자기 아내를 우리 의상실로 보냈더군요. 그 뒤로 소문이 많이 났어요."
오랜 고객인 배우 정혜선·유지인·금보라는 15년째 에스모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오래전 패션쇼에 배우 이영애를 세운 적도 있었다. "결혼 못 할 수도 있으니 웨딩 가운을 꼭 입고 싶다고 했어요. 웬걸 시집가서 잘 살더군요(웃음)."
―대통령 부인들 의상 디자인도 많이 하셨지요?
"육영수 여사부터 이희호 여사까지, 손명순 여사 빼고 했어요. 하나같이 검소했어요. 어떤 분은 매번 남편이 사준 닳고 닳은 코트를 보여주며 안감만 바꿔달라 했어요. 우울증 앓던 분도 있었고. 더는 얘기 안 하렵니다."
대통령 부인 옷은 반드시 한국 원단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국산 옷감이 다양하게 없던 시절이었어요. 이명희(신세계 회장)씨가 참 애를 많이 써줬어요. 대통령 해외 순방 갈 때 없는 원단도 개발해주고. 뒤에서 우리 패션을 위해 노력한 고마운 분입니다."
지난 6월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가 방한했을 때 입은 원피스가 화제였다. 그 옷 디자이너 정고운('고엔제이')이 에스모드에 다니다가 프랑스로 갔다. "우리 애들이 참 잘해요." 손녀뻘 제자의 청출어람(靑出於藍)에 할머니 미소를 지었다.
나이에 맞는 옷은 없다
1988년 에스모드 파리에서 서울 분교 설립 계약을 체결할 때 모습. / 에스모드
―에스모드 서울에서 유학한 중국 디자이너 황원어씨가 한 인터뷰에서 자기 패션에 가장 영향 준 사람으로 이사장님을 꼽았습니다. "연세가 많지만 옷 입는 스타일, 품위는 최고였다"면서요. 비결이 뭘까요.
"자신감입니다. 당당하게 입어야 그 사람 성격과 센스가 드러나요. 쭈뼛쭈뼛하면 좋은 옷도 얻어 입은 옷같이 보입니다."
―고령화 사회가 됐는데, 노년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다고 해요.
"예전엔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입는 정형화된 스타일이 있었어요. 밍크, 이세이 미야케 주름 옷…. 요즘은 '나이에 맞는 옷'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저는 20대 우리 학생들 옷이 예쁘면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봅니다. 남성복도 종종 입어요." 옆에 앉은 직원이 "20대 학생보다 더 예쁘게 입는 80대 할머니로 통한다"며 "항공점퍼, 청바지 가리지 않고 입으신다"고 했다.
―요즘도 학생들 졸업 작품을 일일이 평가한다고 들었습니다. 트렌드를 어떻게 좇아가나요.
"사람들은 제가 운이 좋아서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해요. 운 아니에요. 인터넷으로 WWD(패션 전문 매체) 미국판·일본판 다 봅니다. 백화점, 개인 부티크 돌아다니면서 시장조사도 해요. 코스, 자라 같은 SPA 브랜드도 가봐요. 아마 매장에서 최고령 손님일걸요(웃음)."
―아직도 꿈이 있는지요.
"학교 열고 10년 되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어요. 남성복은 그래도 디자이너 정욱준('준지')을 배출했는데 이름난 여성복 디자이너가 아직 안 나왔어요. 꼭 만들어야죠."
―옷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이 우리 학교 개교할 때 축사에서 그랬어요. 자기는 식(食)을 전공(영양학)한 사람인데 저하고 논쟁하다 졌다면서요. 제가 '옷을 입어야 밖에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의식주 가운데 옷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했답니다." 옷은 곧 사람이요, 인간관계이자, 삶이란 얘기였다.
자서전 쓰라고 권하는 이가 많지만 다 거절했단다. "저는 옷과 결혼했어요. 학생들이 아들딸이고 학교가 제 자서전입니다. 뭘 더 써요(웃음)." 옷과 백년해로하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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