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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전등사. 나부상. 정족산사고

by 한국의산천 2015. 6. 6.

메르스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강화도에 위치한 전등사를 돌아보며 숲길을 걸었다 [2015 · 6 · 6 · 화창한 토요일 (현충일)]

 

현충일 추념사를 들으며 전등사로...

 

분단 70년 제60회 현충일

 

오늘 제60회 현충일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면서 그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 침략에 대한 걱정없이 안보를 튼튼히 하고 온 국민이 지역 감정없이 하나된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강화도 정족산을 둘러 싸고있는 삼랑산성을 돌아본다.  
  

산성에 얽힌 단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조선왕실의 사고(史庫)수호사찰이었던 전등사

 

하늘은 화창하고 온 천지가 신록으로 가득한 날 전등사에 오르다  

전등사는 독특한 절집이다. 산성 안에 절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등사에는 산문이나 일주문이 없다. 대신 종해루(宗海樓)란 이름을 가진 삼랑성의 남문과 누각이 없는 아치형태의 동문이 절집의 출입구인 일주문 역할을 하는곳이다.

 

 

 

 

 

 

 

 

 

 

▲ 전등사 남문 출입문 종해루 ⓒ 2015 한국의산천  

  대개의 사찰이 일주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전등사는 성문(남문)이나 동굴처럼 생긴 아치형의 문(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전등사 전체가 산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산성이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정족산성이다.

  고대에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던 것을 삼국시대에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더욱 튼튼하게 보강되었다. 성 안에는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있고 원래 동서남북 네 개였던 출입문은 현재 동문과 남문만 사용되고 있다. 이 두 개의 문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독특하게 다른 절의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꽃은,
아무 때나 피고 지는 법이 없지요

 

술이 넘치고 웃음이 넘치는 주막이라 해서 주모의 연정(戀情)까지 넘치는 것은 아니 옵지요

뭇 사내들이 헐값으로 흘리고 가는 정을 다 품을 수는 없지요 - 노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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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는 '부처님 지혜의 등불이 대대로 세세생생 전해지는' 절집이다.

 

대웅전 추녀아래 나부상도 글자 없는 경전이다. 부처님의 말 없는 가르침이다.

사랑은 고행이다. 결코 천년만년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풀잎이슬 같은 것이다.

도편수의 사랑은 한순간에 미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서푼짜리 저잣거리 사랑’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

사랑은 자고 나면 미움이 되고, 탐욕이 되고, 돈이 된다. 탐욕과 사랑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종이 한 장 차이다.

 

 

▲ 전등사 대웅보전 앞에 있는 대조루 ⓒ 2015 한국의산천

 

  전등사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서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전면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이곳을 지나려면 천장이 유난히 낮아 머리가 다을듯하기에 허리를 굽히고 통과하는 곳이다. 이곳을 통과하여 계단을 몇개 오르면 대웅전이 나타나며 법당의 부처님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겸손한 마음으로 절에 들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올라 보면 남동쪽으로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 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 허리를 숙이고 대조루를 통과하면 바로 보이는 전등사 대웅전 ⓒ 2015 한국의산천

 

 기록에 따르면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서기 381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에 의해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9년만의 일이다. 이후 고려 말인 1282년, 왕비 정화궁주가 절에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등'은 부처의 가르침을 뜻한다. 때문에 전등사라는 이름은 '불법을 전하는 사찰'이라고도 해석된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전등사는 단아하다. 고즈넉하다. 크지 않아 편안하다. 정족산의 삼랑성 안에 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은 2.3km 길이의 성이다. 전등사는 일주문이 따로 없다. 삼랑성 남문과 동문이 곧 일주문 역할을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 양헌수 대장(1816∼1888)은 바로 이 남문 동문에 300여 명의 포수를 나눠 배치했다. 11월 9일 프랑스군 160명이 이 두 성문으로 공격해 오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적군은 사망 6명 부상 60여 명의 흔적을 남기고 퇴각했다.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 4명뿐이었다. 성 안의 정족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무사했던 것도 바로 이 승리 덕분이었다.

 

 

▲ 나부상인가? 원숭이 상인가? (사진 정중앙) ⓒ 2015 한국의산천

전등사 대웅보전 네 귀퉁이의 연꽃좌대에 쪼그리고 앉아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조각상(또는 원숭이상) ?

 

대웅전 지붕의 네 귀퉁이, 날아갈 듯 하늘을 향해 들려있는 추녀 아래에 이상한 형상의 조각들이다. 이 조각을 두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석가모니의 전생 중 하나인 흰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고, 불교의 악귀 중 하나인 나찰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여러 설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가 벌거벗은 여인의 형상, 곧 '나부상'또는 나녀상(裸女像)에 관한 한 도편수와 주모의 그럴싸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등사 

 

      - 고 은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시인 고은 선생은 효봉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하였고 해인사에서 4.19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임명을 받고 법주사를 전등사 주지와 교환하여 전등사 주지를 역임(1967년)하셨다 한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사랑을 배반하고 떠난 도편수의 연인인 나부상(나녀상 裸女像)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렇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전등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지리적 특성으로 섬에 들어오면 수개월째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던 탓에 외로움을 달래려 사하촌의 한 주막을 찾았고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이 일이 끝나면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불상이 모셔진 금당이지만, 설령 저잣거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고 해서 불경스럽다고 할 필요는 없다. 절이란 모든 사람 가리지 않고 껴안고 보듬으며 깨달음으로 나가도록 등을 도닥여 주는 곳이지 않은가.

 

  어쨌던 전설은 흥미롭지만 종종 현실을 비껴가고, 기록은 생생하지만 대개 상상력이 부족하다. 전등사 대웅보전은 역사인 동시에 전설일 뿐이다. 하여간 위의 조각상은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무거운 천정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 2015 한국의산천

 

전등사 나부상의 전서(傳書)

- 도편수에게 보내는 - 
                                        

                                    노 운 미


꽃은,
아무 때나 피고 지는 법이 없지요

 

술이 넘치고 웃음이 넘치는 주막이라 해서 주모의 연정(戀情)까지 넘치는 것은 아니 옵지요

뭇 사내들이 헐값으로 흘리고 가는 정을 다 품을 수는 없지요

도편수 당신의 사랑, 당신의 것이기에 흐르고 넘치는 것 또한, 내 알 바가 아니었지요

어찌, 사내들은 없는 사랑을 짜내라  떼쓰는 어린아이와 무에 다른지

웃음을 판다 하여 분명, 속도 지조도 없는 여인네라 판단치 마시라 당부 드렸는데 허투루 들은 탓을 내게 돌리시다니…,

내 떠난 것은, 도편수 당신의 마음을 알았기에 상처 될까 심려한 배려였거늘

그 순수했던 사랑을 처마 밑에 걸어두고 욕보인 당신의 어리석음이 벌거벗겨진 내 몸뚱이, 내 마음이 걸린 것보다 더, 안타까울 뿐이지요

사백년을 처마 밑, 허울 좋은 하눌타리 사랑으로 버텨! 야 하다니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좋은 글귀가 담긴 푯말 바로 뒤의 나뭇잎도 아름다운 보케로 배경이되어 ⓒ 2015 한국의산천  

 

 

 

 

 

조선왕조실록과 정부 문서를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史庫)

설립일 : 1678년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해주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와 객사를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과 함께 선원각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두산백과 참고-

 

 

 

 

 

 

 

 

 

 

▲ 이 풍경을 보며 이양하님의 '신록예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2015 한국의산천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

중략

.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群俗)을 떠나 고고(孤高)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恍惚)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汚辱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寧日)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汚點) 또는 한 잡음(雜音)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

하략

.

- 이양하 신록예찬 중에서 -

 

 

 

 

▲ 작은 아치형의 전등사 동문 출입문 ⓒ 2015 한국의산천

이곳이 전등사의 일주문 역할을 하는 동문 아치 성문.

 

  단군 왕검이 세 아들(부루, 부소, 부여)에게 봉우리 하나씩 성을 쌓게 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삼랑산성 안에 자리 잡은 절집의 위치도 유별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정족산사고'를 지킨 조선왕실 종찰로서의 사격(寺格)도 이채롭다. 사고수호사찰(史庫守護寺刹)은 전등사와 함께 월정사(오대산사고), 안국사(적성산사고), 각화사(태백산사고)뿐이기 때문이다.

 

 

 

 

▲ 삼랑산성 ⓒ 2015 한국의산천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랑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쌓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랑산성은 타 지역의 산성과는 달리, 성내에는 오직 전등사만 있기 때문에 역사성과 희귀성을 함께 간직한 산성으로 유명하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2.3km로 높낮이의 편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쉽게 올라 일주를 할 수 있다.

 

 

 

 

 

이곳에 오르면 초지대교와 염하강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내일은 친구들과 신록으로 가득한 임도 라이딩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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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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