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섬강과 여강길을 걸었습니다. 라이딩을 위해 차로 일부 구간 답사를 했습니다
여강길 원점회기코스 55km.
나에게도 이러한 열정과 정열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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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보 전망대와 휴게실 ⓒ 2012 한국의산천
▲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길 ⓒ 2012 한국의산천
▲ 보물 463호 흥법사진공대사비(興法寺眞空大師碑) ⓒ 2012 한국의산천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진공대사 충담(眞空大師 忠湛 : 경문왕 9, 869~태조 23, 940)의 비. 비 건립에 몇 년씩 소요되는 다른 비와는 달리 대사가 입적한 바로 그 해(940년)에 신속하게 건립되었다.
보물 제463호이며, 현재 귀부와 이수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절터에 남아 있으나 비신은 일찍이 파괴되어 중앙부가 크게 절단되었으며 파손과 마모가 심하다.
깨진 비신 4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비문은 고려 태조가 짓고 문신 최광윤(崔光胤)이 당나라 태종(太宗)의 행서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비문은 진공대사가 신라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계율을 배우다 입당하여 원정(圓淨)의 법을 수학하고 돌아와 태조로부터 왕사의 예우를 받고 태조의 명으로 흥법사에 주석하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는 대사가 태조에게 올린 표(表)와 태조가 대사에게 내린 글이 나란히 실려 있어 흥미롭다. 맨끝에 상좌 장로 등의 제자와 낭중 시랑 등의 직명과 내말의 관등을 가진 재가제자(在家弟子)가 열거되어 있다.
▲ 진공대사라는 글씨가 선명히 남아있는 원주 흥법사의 ‘진공대사비’는 고려 태조 왕건이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940년 건립됐다.
<비문 해석문>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 왕사(王師) 진공지탑(眞空之塔).
(결락) 신(臣) 최광윤(崔光胤)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당태종(唐太宗)이 짓고 왕희지(王羲之)가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대개 들으니 부처님은 미언(微言)으로 교를 세워 비로소 취령(鷲嶺)에서 말씀을 열었으며, 가섭은 묘지(妙旨)로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는 마침내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갔다. 비록 말로는 교리(敎理) 밖에 별도(別途)로 전하였다고는 하나, 그윽이 생각건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함께 품수(禀受)하였다. 경희(慶喜)는 가섭의 제자가 되었고, 상나화수(商那和修)가 아난(阿難)의 법을 전해 받아 제3조(祖)가 되었다. 그로부터 제12조(祖)인 마명(馬鳴)에 이르러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면서 묘법(妙法)을 삼승(三乘)에 드리웠고, 제14조(祖)인 용수(龍樹)는 꽃다운 향기를 드날리면서 (결락) 보았다.
그가 주창한 법(法)은 즉상(卽相)이나 이상(離相)이며, 몸이 아니나 곧 몸인 것이다. 강급(降及)(결락) 처음으로 원각대사(圓覺大師)가 중국의 양조(梁朝) 때 들어왔고, 비로소 대홍(大弘)을 만났다. 달마는 양무제를 만난 다음, 북쪽 위(魏)나라로 가서 효명제(孝明帝)를 만났다. 그리하여 대조(大祖)인 혜가(慧可)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계합(契合)하여 동풍(同風)을 부촉하였다.
그로부터 조법(祖法)을 상승(相承)하되 심등(心燈)을 계승하여 대대로 이어져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화(一花)가 훌현(欻現)함에 육엽(六葉)이 거듭 무성하였다. 근래 강서(江西 : 馬祖道一)로부터 해예(海裔)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라서 봉림가(鳳林家)의 제자요, 장경(章敬)의 증손인 우리의 진공대사(眞空大師)가 다시 선종을 천양하였다.
대사의 법휘는 충담(忠湛)이요, 속성은 김씨며, 그의 선조(先祖)는 계림(鷄林)의 관족(冠族)이고, 토군(兎郡)의 종지(宗枝)로서 분파(分派)되어 영광을 누렸으며, 상진(桑津)에 의해 별파(別派)로 갈라졌다. 원조(遠祖)는 다(多) (결락) 도잠(陶潛) (결락)이 벼슬에 얽매어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겠다 하였고, 가후(賈詡)와 같은 공을 세우기를 희망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녹위(祿位)를 귀함이겠는가. 그러므로 고반(考盤)과 같이 도(道)를 즐겼다. 일찍부터 『장자』와 『열자』 등의 서적을 전공하였고, 초야에 살면서 은사(隱士)를 불러 같이 노래를 읊으며 시정(市井)과 조정(朝廷)의 명예를 피하였다. 모어(母於) (결락) 현지자(賢之子)이니 어찌 성선(聖善)의 마음을 닦음이 없었으랴! 이러한 영기(靈寄)로운 태몽을 감득하고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를 희망하던 중 함통(咸通) 10년 1월 1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남다른 특수한 모습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농담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락) 초인적(超人的)인 영특한 성품(性品)을 가졌으며 신비한 지혜는 따를 자가 없었다. 괴시(槐市)에서 경을 배웠고, 행원(杏園)에서 과거(科擧)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부모가 관상 보는 사람을 불러 관상을 보였더니 “감라(甘羅)가 입사(入仕)하던 나이에 이르면 이름을 떨침이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가의(賈誼)가 박사(博士)되던 나이에 (결락)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대사는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孤兒)가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장순선사(長純禪師)가 절로 데리고 가서 상좌를 삼아 득도(得度)시켜 사미계를 받게 하였으니, 이전부터 장순(長純)은 대사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
대사(大師)는 장순장로(長純長老)를 따라 거처를 얻어 (결락) 속진(俗塵)을 여의고 공문(空門)에 들어가 바야흐로 승위(僧位)에 올라 부지런히 정진 수도하여 승당도오(昇堂覩奧)하므로 입실건당(入室建幢)하게 하여 전법제자를 삼았으니, 이심전심한 사자(師資)의 정이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 돈독하였다. 후배들이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와서 뒤에 출발하였으나,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적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으며, 각(覺)의 지파(枝派)가 계속 이어지면서 먼저 시작하여 늦게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선림(禪林)에서 지내면서 (결락) 우유(優遊)하였다. 인도에서 발상한 불교를 거듭 중흥하여 마침내 계계승승의 법맥(法脈)을 이었다. 능가(楞伽)인 선종이 재흥(再興)할 기회를 엿보면서 발원하여 오다가 용기 원년(龍紀 元年)에 무주(武州) 영신사(靈神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법상종(法相宗)과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결락) 종지(宗旨)를 들어 도(道)를 토론하면서 학인(學人)들에게 이르되, “처마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도 계속 떨어지면 능히 돌을 뚫으며, 두 사람의 마음이 굳게 합쳐지면 능히 쇠도 끊을 수 있다”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불을 붙이려고 나무와 나무끼리 마찰하는 것과 같이 계속적인 노력과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달통(達通)을 얻게 된 그 원인은 모두 적미(積微)와 같은 작은 일도 쉬지 아니하며, 비록 규보(跬步)라도 계속 전진(前進)한 탓으로 마침내 학해(學海)의 공을 이룩하고, 길이 빛나는 (결락) 성취하였다. 석자(釋子)인 천일(天日)선사가 당시 전후 현실인 흉년과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산야(山野) 곳곳에 말라 흩어진 폭골(曝骨)과 아직 썩지 아니한 시신이 낭자한 광경을 보고 생각하되 “다른 산중(山中)들은 조용한 곳이 많으니 어찌 피난할 곳이 없겠는가. 이곳은 위험한 곳이므로 오랫동안 거주(居住)할 생각은 없었다.” (결락) 지화(之華) (결락) 자(者)와 같이 배를 타고 가서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이 때 그 길로 곧바로 운개사(雲蓋寺)를 찾아가서 부원대사(淨圓大師)를 친견하였다. 대사(大師)는 구름 덮인 산골에 살면서 석상(石霜)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학인을 지도하고 있었다.
지(知) (결락) 대사가 원이(遠離) (결락) 원남(圖南)의 웅지를 품고, 분지를 발하여 구름을 덮을 수 있는 날개를 펴고 견성성불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려는 서원이 날로 향상하여 불일(拂日)하는 예장나무 가지를 높이 흔들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대사가 이르되 “네가 이곳에 와서 유학(遊學)하되 마치 천우교목(遷于喬木)과 같이 다시 정진할 원력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곳인 보소(寶所)를 떠나지 아니하고 (결락) 그 후 하동(河東)으로 가서 자악선원(紫嶽禪院)에 입방하여 처음부터 성전(聖典)을 연구하고 다시 우혈(禹穴)지방을 탐방하고, 그로부터 영적(靈跡)을 답사하는 행각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연대(燕臺)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천우(天祐) 15년 6월에 (결락) 이르러 귀국하게 되었다. (결락) 학인(學人)들이 함께 와서 친견하고 환희에 가득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뼉을 치면서 앙모하였다. 그리하여 수월(數月) 동안 선(禪)을 논하고 수년간(數年間) 법문을 물어 왔다.
마치 미천(彌天)이 입을 벌리고 이왈(離曰)이 입술을 놀리는 것과 같아서 어로(語路)의 발단을 헤아리며, 언어(言語)의 단서를 잘 짐작하였다. 이 때 양지(兩地)에서 지난날의 자취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결락) 지광(之光). 갑병(甲兵)의 빛이 나타남을 걱정하다가 홀연히 김해를 떠나 옥경(玉京)을 향해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마치 마륵(摩勒)이 다시 퍼진 것과 같을 뿐 아니라, 또한 우담바라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았다.
공손히 내전(內殿)으로 맞이하여 모시고 (결락) 모든 중신과 궁내인(宮內人)들이 법문을 청함에 스님은 법상에 올라앉아 상왕(象王)의 설(說)을 토(吐)하니, 거듭 경의를 표하며, 제자(弟子)의 예의를 펴고, 들은 법어(法語)를 낱낱이 기록한 다음,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결락) 청정한 정려(精廬)로 옮겨 모셨다. (결락) 어느 날 다시 단겸(丹慊)을 떠나 경기(京畿)에 도착하였으므로 왕은 별도로 옥당(玉堂)을 꾸며서 승탑(繩榻)에 오르시게 하고 대사(大師)에게 묻되, “과인(寡人)이 어려서부터 위무(威武)는 숭상하였으나,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선왕(先王)의 법도를 알지 못함이니, 어찌 (결락) 존망(存亡)의 뜻을 (결락)를 분별하겠습니까?”
기쁘게 여기는 바는 명제(明帝)가 꿈을 꾸고 노력한 것과 같이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마치 한(漢)나라 명제(明帝)인 세종(世宗)이 마등과 법란을 만남과, 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보지공(寶誌公)스님을 만난 것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세세생생에 영원히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길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지극한 신심(信心)을 표했다. 그리하여 흥법선원(興法禪院)을 중건하고 스님을 여기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길상지(吉祥地)가 오히려 지난날의 미덕(美德)을 논하게 되니, 복을 맞이하는 명당(明堂)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이곳을 세상을 마치려는 종신지지(終身之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선원을 크게 확장한 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과 같고, 배우는 사람들이 날로 진취됨이 마치 안개와 같았다. 의구(依舊)히 유리 (결락) 어국(於國) (결락) 모두가 불법 중흥주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직접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절에 가도 거절되고 더불어 말조차 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의 유숙도 허락받지 아니 하였으니, 어찌 대사(大師)가 평소에 이러한 편벽된 생각이 있었겠는가. 덕의 부유(富有)함은 (결락) 좌품(座品)의 (결락) 과 달랐다. 천복(天福) 5년 7월 18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이르되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하고, 적연(寂然)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얼굴빛은 생전(生前)과 다름이 없었다. 세속 나이는 72세요, 승랍은 (결락) 이었다. 땅은 진동하고 산은 무너지며, 구름은 수심에 잠기고 해는 처참하였다. (결락) 그리하여 산곡(山谷)에는 애도와 슬픔이 가득하였고, 사부대중(四部大衆)과 천인(天人)들은 모두 절학(絶學)의 슬픔을 더하였으니, 어찌 뼈에 사무치게 애통하지 아니하랴! 제방(諸方)의 사서(士庶)들은 모두 스님의 열반에 대해 울면서 통곡하였다. 따라서 과인(寡人)도 갑자기 열반 소식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간절히 스님의 크신 덕을 추모하여 마지못했다.
특히 종림(宗林)의 선백(禪伯)이고, 말세(末世)의 고황(古皇)으로 (결락) 긴 수명을 누리지 못하시고 뭇 중생의 우러름을 어겼도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진실인 법체(法體)는 길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먼저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고, 뒤에는 숲이 없어지니 새가 날아가는 것을 슬퍼하도다. 바라는 바는 조속히 명체(明禮)를 갖추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하고, 시호를 진공대사(眞空大師), 탑호를 (결락) 지탑(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대사(大師)는 설산(雪山)에서 성도하고, 연동(煙洞)에서 마음을 증득하여 18대(代)의 조종(祖宗)을 전하였고, 3천년의 선교(禪敎)를 통괄하였으니, 말세의 중생을 크게 교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광범하게 교화한 공적을 열거한다면 비록 황여(黃輿 : 地球)라고는 하나, (결락) 모든 향기는 사라지고, 문득 호접(胡蝶)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니, 수(水) (결락) 망기(忘機) (결락) 생전(生前)에 스님과 과인(寡人)은 마치 압구(狎鷗)처럼 친했던 감회를 일으키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화(敎化)와 도덕이 무한(無限)함을 나타내고자 하니, 참으로 신독(身毒)의 풍속을 드날리고, 축건(竺乾)의 법을 부연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문도 제자 5백여 명이 (결락) 신지속(身之贖). 높고 푸른 산이 깊은 골짜기로 변하고, 넓은 발해 바다가 (결락) 전답(田畓)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나에게 진정(陳情)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碑文)을 주청하였다.
이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마침내 나는 윤허(允許)를 받았으니, 바라는 바는 스님의 무위덕화(無爲德化)를 나타내어 마치 물과 구름처럼 영원(永遠)히 썩지 않게 하려고 금석(金石)에 새기는 것이다. 애통한 마음으로 가능한 데로 제구(虀臼)를 지어 문인(門人)을 위로하고, 민(閔) (결락) 지심(之心). 아름다움을 백대(栢臺)로 돌리고, 국사(國士)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뜻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명(銘)을 지어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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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락) 소인기(蘇認己)
보배를 감추고 법인(法印)을 알았네.
자비의 그 배는 풍랑(風浪)에 빠졌고
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었네.
은빛 난 석등(石燈) 불 영원히 비추리.
陰記
영봉산(靈鳳山) 고국사(故王師) 진공대사탑음(眞空大師碑陰)
대개 듣건대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물을 여는 것과 같은 인정(仁政)을 베풀었고,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결락) 서축(西竺)에서 발상한 불교가 중국에 전래(傳來)된 이후, 유일(唯一)한 호법왕(護法王)일 뿐만 아니라 보지공(寶誌公)스님을 친견하고 마주 앉아 동방(東方)의 풍속을 이야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가 널리 홍포되기 시작하였다. 위(魏)나라 손권(孫權)은 조신(朝臣)들을 모아 거마(車馬)로써 강승회(康僧會)스님을 맞아들여 존경하여 왕과 함께 동울(東菀)에서 놀았으며, 또한 같은 여(輿)를 타고 함께 다니기도 하였다. (결락) 우리나라에서도 삼한(三韓)이 각립(角立)하여 아직 누가 승리할 것인지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없었으나, 이젠 고려 일국(一國)이 웅비(雄飛)하여 문득 전쟁의 우열을 가렸고, 멀리에서 성덕(聖德)을 입고, 널리 (결락) 대사(大師)께서 표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정기가 사유(四乳)와 같고, 눈에는 두개의 눈동자가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찰(梨察)은 원황(元皇)의 자리에 있었음이 마치 불도징(佛圖澄)이 후조의 고조인 석륵(石勒)의 귀의를 받음과 같다 하겠다.
그러나 오히려 (결락) 스님들은 시정(市井)에 내주(來往)하기를 싫어하고, 뜻이 산가(山家)의 울창한 숲 속에서 수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도인(道人)은 곧 해국(海國)의 고요한 곳에 주(住)하게 되었으니, 질질(秩秩)한 군자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를 희망하였다. 련기(憐其) (결락) 대사께서는 이제 낙토(樂土)를 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자 커다란 일축의 글을 구중(九重)의 궁궐로 보내왔다.
과인(寡人)이 대사와 더불어 정(情)의 깊음이 아교와 칠보다 더하였고, 의리는 (결락) 동국을 불국화(佛國化)하려는 서원이었다. 흥법선원이 비록 고사(古寺)이긴 하나, 오히려 동방(東方)에 있어서 화상(和尙)의 생전(生前)에 길이 중생을 교화할 곳을 삼았던 절이다. 대사의 재가제자(在家弟子) (결락) (以下는 『金石苑』에 의함).
주반(州官)
통현상좌(通玄上座)
낭중(郞中):민회타(旻會朵) 광휴장로(廣休長老) 김순타(金舜朶)
시랑(侍郞):흥림타(興林㭐) 혜태장로(惠泰長老) 수영타(秀英㭐)
상타(上㭐) 신희타(信希㭐) /금석문 자료에서 옮김.
폐사지의 석축가에서 홀로 오랜 세월의 풍상을 참아내며 이절의 성쇠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가 아득한 시간의 이편과 저쪽을 이어준다.
잔디와 풀로 잘 정비되어있는 너른벌판위에 석축과 탑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옛날 깊은 산골에 이렇게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 너른 터에 풀이 널리 깔려있지만 번성했던 그 예전의 영화가 한눈에 느껴지는 곳이다.
▲ 텅 빈듯한 폐사지에서 ⓒ 2012 한국의산천
비어있기에 채울 것이 더 많아 충만한 곳이라면 너무 언어의 비약일까?
은모래금모래 강길 따라 낭만 따라 [출처 : 월간 山 / 글·김기환 기자/ 사진·허재성 기자]
영월루~강변유원지~강천보~우만리나루터~도리마을 15.4km 1코스
걷기코스는 문화와 이야기가 접목된 곳일수록 인기 있기 마련이다. 지리산둘레길이나 제주올레길 같은 유명 코스는 그 모체가 되는 대상지의 무게감이 역시 대단하다.
여주 여강길의 테마는 남한강이다. 그 길고 아름다운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다. ‘검은 말(驪)을 닮은 강(江)’이라는 뜻의 여강은 긴 남한강의 물길 중 여주를 휘감아 도는 40여km 구간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 억새가 펼쳐진 은모래금모래 유원지 부근의 강변길.
예로부터 남한강은 물류와 교통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던 강이었다.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로 여주에만 12개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여강길은 옛사람들이 다니던 여주 남한강 주변의 여러 길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탐방코스다.
총 연장 55km인 여강길은 하루에 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한나절 거리의 3개 코스로 구분해 두었다. ‘나루터 길’이라 부르는 1코스는 옛 나루터의 흔적을 따라 걷는 코스로 총 거리 15.4km에 5~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부라우와 우만리, 흔암리 등 옛 나루터의 흔적들을 좇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2코스는 ‘세물머리길’로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삼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따르는 코스다. 총 거리 17.4km에 6~7시간 정도 소요되며 다른 코스에 비해 차도를 걷는 구간이 많은 것이 흠이다.
3코스 ‘바위늪구비길’은 홍원창에서 바위늪구비를 거쳐 신륵사로 이어지는 코스로 총 거리 22.2km에 7~8시간 정도 소요된다.
▲ 신륵사 입구에 새롭게 단장한 산책로.
4대강 사업으로 새롭게 변해
여강길은 강과 습지의 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명소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며 모습이 많이 변했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구간은 자연스러운 경관을 잃었다는 비난도 있지만, 쓰레기가 방치되던 곳을 정리해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도 있다.
과거 여강길은 강변의 억새밭 사이로 이어진 울퉁불퉁한 길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경수 사이에 조성한 평탄한 산책로가 그 길을 대신하고 있다. 곳곳에 쉼터와 전망대를 만들어 자전거를 타거나 쉬어가기는 편해진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 예전보다 더 아름다운 여강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정답은 세월이 말해 줄 것이다.
현 시점에서 여강길 걷기에 가장 무난한 구간은 1코스다. 남한강변을 따라 옛 나루터들을 보며 걷는 길이다. 사실 예전의 운치 있는 나루터를 기대하는 이들은 실망할 수 있다. 준설공사가 진행되며 모래톱이 사라지고 구불구불한 강길이 곧게 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다양한 편의시설이 길 주변에 들어서며 편리해졌다.
▲ 강천보를 조망하기 좋은 쉼터.
1코스의 시작은 영월루다. ‘달을 맞이하는 누각(迎月樓)’이란 뜻처럼 누각에 오르면 강 건너 맞은편에 자리한 천년고찰 신륵사와 여주를 관통하는 여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1925년까지 기좌제일루(畿左第一樓)라 칭한 영월루는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영월루에 올랐다가 보도를 따라 걷다 보면 유원지로 들어가는 산책로가 보인다. 새롭게 단장한 길을 따라 들어가면 고운 모래가 아름다운 은모래금모래 유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강가에 긴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둑이 높아지며 지형이 약간 변했다. 강변을 따라 평탄한 산책로가 새롭게 조성됐고 곳곳에 쉼터가 보인다. 본격적인 여강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 여주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목아박물관. / 여주 여강길 표지리본.
강천보에서 보는 남한강 풍광도 근사
강변의 억새밭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이호대교 밑을 지나 부라우나루터를 지난다. 커다란 바위와 강물이 조화로운 이곳은 주변 바위들이 붉은색을 띠어 ‘부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여주읍 단현리와 여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는 유서 깊은 나루였다. 지금은 부근에 강천보가 들어서 색다른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최근 개통한 강천보에 올라 보는 남한강 조망은 여강길의 새로운 명물이다. 강천보는 높이 3m의 회전식 수문 7기를 설치해 평상시에는 수문을 세워 수위를 유지하다가 홍수 시에는 바닥에 눕혀 물을 내려 보낼 수 있다. 보 상부에 설치된 공도교는 여주의 상징인 황포돛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다리 위에서 수문을 빠져나오는 험악한 강물의 흐름도 볼거리다. 강천보를 통해 강을 건너면 오감도토리마을과 목아박물관을 거쳐 신륵사로 이어지는 3코스 구간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강천보에 올랐다가 우만리 나루터를 지나면 선사시대 유적이 남아 있는 흔암리로 접어든다. 흔암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선사유적지도 볼거리다. 이 시대는 낮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시작됐는데, 가옥과 화덕자리 등 옛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새롭게 단장한 은모래금모래 유원지 느티나무 숲.
흔암리를 지나면 여강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솔길로 꼽는 ‘아홉사리과거길’이 나타난다. 자연의 모습이 살아 있는 운치 있는 곳으로 약간 험한 산길을 걷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이 길은 흔암리의 청소년수련원과 여흥 민씨 집성촌인 도리마을 사이의 남한강변의 아홉 굽이 산모롱이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문경새재나 죽령을 넘어 이 고갯길을 지름길 삼아 넘어 다녔다고 전한다.
고개를 넘으면 1코스의 종착지인 도리마을에 다다른다. 예전에 점동면 장안리 마을 서편에 ‘도호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강변 쪽이 생활이 편리하고 토양이 비옥해 그곳 사람들이 이동해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명칭이 도래(桃來)가 되고 되래로 발음했으며, ‘도리’라는 행정지명으로 굳어졌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여강길 3개의 답사코스 중 2코스 ‘세물머리’ 구간은 총 17.4㎞로 청미천과 중군이봉, 삼합리, 개치나루터, 법천사지, 흥원창 등을 거친다. 마지막 3코스 ‘바위늪구비길’은 흥원창에서 시작해 해돋이산길, 여성생활사박물관, 오감도토리마을, 목아불교박물관, 신륵사 등을 거치는 코스다.
추천할 만한 코스는 영월루에서 시작해 1코스 중간의 강천보를 건너 3코스 바위늪구비를 통해 홍원루로 연결하는 것이다. 강변길을 계속 따르며 찻길을 피할 수 있어서 강변을 걷는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 너른 강편 풍광이 펼쳐지는 강변유원지 초입의 산책로.
찾아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을 나와 37번도로를 타고 여주 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강변유원지 입구 이정표가 보인다. 은모래금모래 유원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강길 걷기를 시작할 수 있다. 예전에는 걷기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임인 ‘여강길’(blog.daum.net/rivertrail)에서 나무 등에 파란색 리본을 달아뒀는데, 지금은 일부 구간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여강길을 방문하는 이들은 강변을 벗어나면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주요 포인트에 ‘문화생태탐방로’ 이정표가 붙어 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문의 여강길(031-884-9089), 여주군청 문화관광과(031-887-2832).
▲ 남한강 건너편에서 본 신륵사 강월헌.
주변 명소 세종대왕릉(영릉·英陵)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1446년(세종28년)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만들었으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파사성 남한강 상류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산야를 한눈에 조망하고 싶다면 파사산의 파사성(사적 제251호)을 추천한다. 파사성은 파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석축산성으로, 신라 제5대 임금인 파사왕(재위 80~112) 때 처음 쌓았고 임진왜란 때 승장 의엄(義嚴)이 승군을 모아 증축했다고 전한다. 성곽 위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이포보의 위용을 감상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신륵사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천년사찰 신륵사. 지는 노을과 남한강이 가장 잘 어우러지는 장관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고려우왕 2년(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또 한 번 중창의 기회를 맞는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다층전탑·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등 조사당과 경기도유형문화재 극락보전과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이 있다.
▲ 국보 59호 높이 4m 55cm의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2007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고려 탑비의 백미인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1085년 고려 선종의 왕명에 의해 세워졌는데 구양순체의 대가 안민후가 글을 썼다. 또 청도 운문사의 ‘원응국사비’는 당대의 학자 윤언이가 글을 짓고 명필 탄연이 글씨를 썼다. 탄연은 이 비문에서 힘이 넘치는 구양순체와, 깔끔한 왕희지체를 결합해 힘과 단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서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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