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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정조의 못다 이룬 꿈 화성

by 한국의산천 2010. 12. 15.

정조의 못다 이룬 꿈 화성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의 야경 ⓒ 2010 한국의산천    

 

불행과 불운의 학자 군주 정조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조

정조의 죽음은 실로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다. 그는 전환기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의 방황은 조선의 방황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었다. 그것은 쇠락의 길이었고 國亡의 길이었다. 조선의 혼이었던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0년이었다.  

 

 

▲ 화성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할 의도로 축조한 성이다. 이곳 수원에는 정조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수원에 자리한 장안문 ⓒ 2010 한국의산천

중국의 번화가 장안을 생각하며 정조께서 지으신 이름. 장안문

화성에는 팔달문,창룡문,장안문,화서문 등 4대문이 있다. 남북의 정문인 팔달문과 장안문의 위용이 눈길을 끈다. 봉돈(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치성(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한 구조물),공심돈(적을 살피는 망루의 일종),암문(군수물자를 성 안으로 공급하는 곳) 등을 볼 수 있다.

 

수원에 자리한 화성.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바라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성벽 길이는 6km. 빠르게 걸으면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천천히 성 안팎을 돌아보고 기록하고 촬영까지 하며 걷는다면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 수원에 자리한 팔달문 ⓒ 2010 한국의산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화성을 완공한 후 펴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 중앙의 출입문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이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고, 팔달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시전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18세기 조선 상인들의 분주한 생활을 상상하며 종로삼거리 쪽을 둘러봐도 좋다. 본래 십자로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영남 유생들이 '무신창의록'을 정조에게 올린 다음 해인 정조 13년(1789) 7월. 정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장헌세자(한 여름날 뒤주속에 갇혀 비운에 떠난 사도세자) 의 묘를 이장 하기로 한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정조 자신이 할아버지인 영조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 임금임을 분병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조선이 노론의 국가가 아니며 뱃성들의 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픈 심정이었을것이다. 조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개국 초 태조가 수도 서울을 개경에서 현재의 한양으로 옮긴 까닭은 개경이 신흥 사대부의 정적인 권문세족들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듯이...  

 

정조는 노론의 서울이 아닌 백성의 서울, 사도세자의 서울, 국왕의 서울을 만들려고 노력하였기에 규장각 설치와 장용영 강화와 새로운 신도시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지로 손 꼽은 곳이 수원면 용복면에 있는 '지극히 길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 화산(花山) 이었다.

 

 

▲ 융건릉 ⓒ 2010 한국의산천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장조 莊祖· 1735년 ~ 1762년, 장헌세자)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의 으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1762년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갇혀죽는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1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6년에 영조가 83세로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3월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으며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조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워나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또한 정조는 영조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해 왔던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 특히 노론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 느리고 더딜지(遲) 두자를 붙여 이름 지어진 '지지대(遲遲臺)고개' ⓒ 2010 한국의산천

 

정조께서는 말씀하셨다 

천천히 가거라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조선 왕조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효자 정조.

정조의 효심이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느리고 더딜 '지(遲)자를 쓴 지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고 돌아오던 언덕에 위치한다.

 

화산의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 고개에서 어가를 멈추어서게 하고 한참을 머무르며 부친의 묘역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 장조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져 이고개를 느리고 더딜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지지대고개에서는 1807년 순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비문을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쓴 '지지대비(碑)'를 만날 수 있다.

 

▲ 지지대비(遲遲臺碑) ⓒ 2010 한국의산천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 융건릉 옅에 자리한 용주사 ⓒ 2010 한국의산천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호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하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렸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최근에 지어진 효행박물관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비롯하여 보물 1095호 봉림사 아마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이 있다. 효성전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만년 위패를 모셨다.

 

 

▲ 용주사 ⓒ 2010 한국의산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지훈의 '승무' 도 이곳 용주사에서 탄생하였다

 

▲ 정조께서 손수 심으신 대웅전앞에 서 있는 회양나무 ⓒ 2010 한국의산천

2005년 봄에 이곳을 찾았을때는 나무 치료중이었지만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절을 중수하면서 정조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로 수령 약 200년으로 추정하고있다.지금은 고사하여 천연기념물에서 제외되었다 ( 前 천연기념물 264호)

지금은 죽어버린 가녀린 나무. 보기가 안스러운 모습이고 아버지를 기리는 정조의 애틋한 효심이 내 가슴에 절절히 다가온다.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華虹門) ⓒ 2010 한국의산천

 

칠간수문마다 오색의 전등을 설치하여 불빛이 아름답다.

청계천의 수문이 다섯 간(五間水門)이었던 반면, 수원천은 그보다 폭이 넓어 칠간수문(七間水門)을 만들었다. 화홍문은 그 칠간수문 위에 자리 잡은 누각이다. 수원천을 따라 인근에 사는 시민들이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을 즐긴다.

 

화홍문(華虹門)

화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화홍문은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을 넘쳐나는 경치가 장관이라 화홍관창이라 하묘 수원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華虹門)의 야경 ⓒ 2010 한국의산천

 

▲ 수원천 위에 지어진 화홍문 ⓒ 2010 한국의산천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 봉돈ⓒ 2010 한국의산천    

돈은 일자문성의 위에, 동2포(東二鋪)와 동2치(東二稚)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案照)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에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다. 

양쪽 가장자리의 층계 끝에는 벽돌로 지은 집이 이어졌고, 용마루 없이 기와로 덮었다. 남북에 각각 한 간씩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온돌로서 지키는 군졸이 거처하는 곳이고, 북쪽 것은 판자를 깔았는데 기계 따위를 넣어둔다.

 

 

 

 

 

 

▲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 2010 한국의산천

'성의 둘레는 무릇 4600보이니,도합 12리요.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무르녹은 봄의 버들잎 형상 같으니,그것은 유천(柳川 · 팔달산 남쪽 작은 개울)이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수원 화성 축조 후 지은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 비문에서)

 

 

 

 

 

 

 

 

▲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

 ⓒ 2008 한국의산천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옆 작은 언덕에 세워진 정자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방문한 뒤 찾아와 활을 쏘고 직접 시를 지어 읊었다고 전해진다. 워낙 풍광이 뛰어나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아래쪽의 작은 연못인 용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용연은 용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가운데에 버드나무가 심어진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 인근의 길은 성벽 안쪽도 바깥쪽도 호젓하고 한가롭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 동북공심돈ⓒ 2010 한국의산천  

 

 

 

 

▲ 똑딱이 카메라로 촬영한 화성행궁 신풍루 ⓒ 2010 한국의산천

※ 야간 촬영시 카메라 조리개는 5.6~8/셧터스피드는 4초 또는 8초로 장시간(?) 노출 촬영하였습니다. DSLR카메라가 아닌 작은 카메라에도 촬영시간 조절기능이 있으니 4초~8초정도를 설정하시고 촬영하시면 야경이 환하게 잘 나옵니다. (삼각대 거치 필수)

 

효성이 남달랐던 정조는 국사로 바쁜 중에도 부친의 능을 13차례 참배했으며 그 기간에는 행궁에 기거했다. 그래서 지방의 궁궐이라고는 해도 규모가 큰 편이다.

정조는 수원에서의 노후를 꿈꾸며 행궁에 노래당(老來堂)을 지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도 행궁에서 촬영됐다. 지금도 세트장 일부가 남아 있다.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 ⓒ 2010 한국의산천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 화성행궁 ⓒ 2010 한국의산천

장남헌은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조선 22대 왕 정조가 정조19년(1795년) 윤2월9일~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 가 묻힌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를 하였다. 본래의 목적은 사갑(死甲)을 맞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였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맞아 잔치를 열었다.

화성으로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조금이라도 험한 길이 나오면 정조는 매번 말에서 내려 혜경궁의 가마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물었다. 어의가 비에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화성에 도착하여 여러 예식을 차례로 치루면서 정조가 의식에 따라 절을 마치자 정조가 지은 어제 장락장(長樂章)을 부르고 어머니에게 머리를 세번 조아리고 천천세를 불렀다.

"긴긴 봄날 장락궁에서 술잔을 올리며, 세차례의 축원을 올리옵니다. 자손에게 끼쳐주신 어머님 은혜, 그 무엇이 이보다 높으리까. 복록이 풍성하게 넘쳐흐르며 찬란하게 빛나옵니다.함지(咸池)의 북소리에 운문(雲門)의 거문고,신선주 따라 올리며 해마다 축원하오리다. 

 

정조가 머리를 세번 조아리자 다시 여집사가 외쳤다.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정조가 손을 마주잡고 이마위에 올리며 '천세'를 축원했다.

여집사가 또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다시 천세를 축원했고, 또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정조가 '천천세'를 외쳤다.

정조가 천세를 부를 때마다 내,외명부와 여관들이 모두 선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했다.

여민락의 환환곡과 청평악,오운개서조곡등이 연주되는 가운데 음식상과 술상이 차려졌다.계속이어지는 가무속에 정조가 연회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자궁(慈宮)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 아 어머니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의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도다. 떠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오래 사소서". 

그날 혜경궁 홍씨는 감격했다고 전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몸소 실천하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 팔달산에서 바라 본 노을과 현재의 농업진흥천이 있는 서호 ⓒ 2008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 그리고 장용영을 통한 정조의 꿈은 차차 무르익어 가는듯 하였지만 끝내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수원에 자리한 화성.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

 

정조는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 나라 조선은 노론의 나라도 아니고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랬다고....그리고 비운에 죽움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갈 뿐이다 ⓒ 2010 한국의산천


 ※ 상기의 내용의 일부는 이덕일의 역사서와 팜플렛과 화성 홈페이지를 참고 하였습니다.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공자-

 

1905년 1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젊은 청나라 혁명가 진천화(陳天華)가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절명서(絶命書)’ 부분이다.

‘우리가 망할 길을 걸은 것이지 어찌 남을 원망하는가. 우리가 망할 길이 없었다면 저들이 우리를 망하게 했겠는가. 조선이 망한 것은 조선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