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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by 한국의산천 2010. 3. 1.

자신이 있던 수몰지구를 바라보며 서있는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보물 제17호)

 

유적지 답사  2010 · 2 · 28 · 일요일 ·흐림 [ 한국의산천 ] 

오늘 답사지 (충주에서 지인 자제분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충주 남한강 주변의 유적지 몇군데를 둘러보았습니다)

 

1.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2. 중원 고구려비

3. 목계나루

4.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5. 법천사지

6. 거돈사지

7. 손곡리 대보름달맞이 놀이.

 

▲ 충주시내에서 동량면으로 들어서는 삼거리에서 보이는 충주댐 ( 충주댐은 저 멀리 산과 산사이 계곡에 희미하게 보입니다) ⓒ2007 한국의산천

 

▲ 새로 만든 등탑비와 그 뒤로 보이는 법경대사자등탑비 ⓒ2010 한국의산천

 

▲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2010 한국의산천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보물 제17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7-1 
시대 고려시대

 

충주호가 만들어 지며 수몰지구에 있던 것을 현위치로 옮겼다.

정토사터에 전하고 있는 비(碑)로, 신라말,고려초의 승려 법경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토사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법경대사가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태조 24년(941)에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비는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당시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비받침에 새겨진 거북조각이나 머릿돌의 용조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 앞면의 중앙에는 ‘법경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비의 몸돌에는 대사의 행적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교의 법을 배워 20세에 불가에 입문하였다. 90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924년에 귀국하였다. 경애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정토사의 주지로 임명하였고, 고려 태조 24년(941)에 63세로 입적하자 태조는 시호를 ‘법경’, 탑이름을 ‘자등’이라 내렸다. 

 

태조 26년(943)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고,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최언위가 지었으며, 유명한 서예가였던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함께 서 있었을 사리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

 

 

 

 

그때가 가을이었지...

 

◀ 이 사진은 2007년 10월

딸과 같이 충주 유적지 답사때 사진입니다

 

그때의 이동경로 : 영동고속도로 ~ 수안보 IC~ 수안보 ~ 충주 미륵리 ~ 사자빈신사지 석탑 ~ 덕주사 ~ 청풍단지 ~ 제천 동산 무암사 & 남근석 ~  정토사법경대사지 (출발,도착 16시간 /총 소요거리 468km)

 

딸과 같이 걷는 길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딸이 지금은 어였한 대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울긋 불긋 단풍이 절정을 이룬 월악산과 충주호

아빠와 딸과 대화를 하며 호젓하게 걷는 답사길 즐거웠습니다.  

 

 

 

 

 

▲ 집사람과 딸이 비의 규모를 보고 놀랍니다 ⓒ 2010 한국의산천

 

규모가 큰 비입니다. 이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저기 산아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이 비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26년(943) 법경대사(法鏡大師)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최언위(崔彦위)가 짓고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법경대사(法鏡大師)는 신라, 고구려의 고승으로 신라시대에는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태조(太祖) 7년(924)에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고 태조 24년(941)에 63세로 입적하니 시호(諡號)를 법경(法鏡), 탑명(塔名)을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전 국토가 박물관, 아름다운 폐허 

옛 절터가 보여주는 건 짓밟히고 깨지고 불타고 남은 것들, 버려져서 더욱 단단해진 것들이다.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것들이, 다져질 대로 다져진 폐허 위에 널렸다. 놀라운 건 폐허 속에 살아남은 보석 같은 유적들이다. 집도 절도 없는 빈터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깔려 있다.

 

천년 세월을 견딘 석탑과 부처상, 비석들은 현란한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섬세하고 또 투박하게 새긴 글씨들도 나그네의 눈을 거듭 새로 뜨게 한다. 폐사지는 불교 유적 이전에 이미 이 나라 역사·문화의 토양이다. 잡초에 묻힌 주춧돌, 발끝에 차이는 기왓조각 하나까지 모두 조상들의 손자취·발자취가 서렸다. 그래서 옛 절터를 찾는 일은 그래서 천년 세월 흥망성쇠의 허망함과 텅 빈 들판에 가득한 절절한 울림을 되새기며 위로받는 여정이 된다.

 

▲ 탑비는 시원하게 펼져진 충주호를 바라 보고 서있습니다.ⓒ 2010 한국의산천   

이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정토사지(淨土寺址)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 충주호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저 아래 어디엔가 있었지만 수몰이 되면서 이곳 언덕으로 옮겨왔습니다. 청풍단지, 수산리에서 이곳을 오기에는 너무 넓은 호수가 가로막혀 험로를 돌아 돌아 왔습니다.

 

법경대사는 879년 1월1일 오시에 태어나 898년에 가야산사(伽倻山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906년에 당나라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구법의 길을 떠났다. 구봉산(九峯山)의 도건(道乾)대사를 만나 법을 구하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은 물론 천태산(天台山)을 비롯한 명산의 선백(禪伯)들을 두루 만나 공부를 이루고 924년에 귀국한 인물이다. 귀국하자마자 고려의 태조인 왕건은 국사의 예로 대사를 맞이했으며 대사를 정토난야(淨土蘭若)에 머물게 했는데 그곳이 바로 정토사이다. 그러나 정토사는 어느덧 폐사가 되고 우리 인간이 만든 커다란 호수로 인하여 본래의 자리를 잃었지만 그 자리가 그리운듯 드넓은 충주호를 바라보며 의연히 서있습니다.

  

▲ 이 비가 1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 2010 한국의산천  

 

▲ 답사시에 정장이란 트레킹화 또는 등산화, 운동화이어야 한다. 복장은 활동하기 편한 간편복 (우의 또는 윈드재킷은 필수) ⓒ 2010 한국의산천

저는 지인의 예식장에 다녀오는 관계로 P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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