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오탁번 굴비 外

by 한국의산천 2009. 1. 14.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세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도 이렇게 아름답고 짠한 한 편의 시가 된다. 우스갯소리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끝나지만 시인은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야담의 주인공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삶의 어떤 절실함 쪽으로 인물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수수밭이랑, 개똥벌레, 베짱이와 같은 배경적 요소들도 시의 진정성을 위해 한몫을 맡고 있다. 관계의 미학이 사라진 시대에 시인은 진정한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었을까? 

 

 

잠지 

   - 오탁번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 먹겠네”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시향> 2006년  봄호

 

 

엘레지

      - 오탁번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탁번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 오탁번

 

가까운 山
더 가까이 보이고
먼 山
더 멀리 보인다

참새 똥 뒤집어 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오탁번 시인

출생 1943년 7월 3일 (충청북도 제천)

 

소속 한국시인협회 (회장)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데뷔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중앙일보(67), 대한일보(69) 신춘문예 당선. 

 

경력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 역임
육군사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수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

 

대표작 1미터의 사랑, 서사문학의 이해, 오탁번 시화, 순은의 아침
시집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겨울강>

 

  

27557

이룰수없는 사랑 -장철웅-

이룰수없는 사랑 -김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