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경복궁 조선의 으뜸 궁궐

by 한국의산천 2007. 7. 1.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돌아보기

[한손에는 우산, 한손에는 카메라 . 답사 촬영. 2007. 7.  1 장맛비 내리는 일요일.   한국의산천 ]

 

경복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 봄)의 터를 잡았다.  

 

 ▲ 근정문 앞에 있는 영제교 ⓒ 2007 한국의산천

궁궐을 드나들 때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이을 살피라는 뜻으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구분지며 건너는 다리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아치형 돌다리 영제교.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경복궁의 주요 전각으로는 근정전(국보 223호), 사정전,강녕전,교태전,자경전,경회루(국보 224호),향원정.자선당,비현각이 있다.

경복(景福)’이란 궁 이름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광화문은 완전 해체를 하여 철거한 상태이다.

 

경복궁은 중학교 시절 사생대회와 겨울이면 경회루 연못으로 스케이트 타러오고 그 후에는 사진을 배울 때 동료들과 자주 찾던 곳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 금천교 사방에 있는 해학적으로 생긴 해태?석상   ⓒ 2007 한국의산천 

금천교에서 밑을 지키는 석상은 용의 아홉아들중 하나로 천을 지키는 산예라고 합니다.(청초호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 근정전 지키는 수비대 ⓒ 2007 한국의산천

 

 ▲ 아침 09: 00 비 내리는 날에도 아랑곳 없이 관광객은 끊임없이 입장하고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근정문

광화문(현재 모두 철거) 을 들어서서 수문장 청을 지나면 남행각 중앙에 자리잡은 홍예문에 이른다. 홍예문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편으로 흐르는 어구가 있고 보도에 이어 돌다리 영제교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근정전일정과 행각 중앙에 중문으로 높이 솟은 우람한 근정문이 있다. 고종 4년에 중건 한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엔 문 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하였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 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 근정문의 아름다운 추녀 ⓒ 2007 한국의산천

 


▲  근정전까지 이어지는 왕도(王道) ⓒ 2007 한국의산천

 

근정문을 지나면 근정전까지는 말 그대로 ‘왕도(王道)’가 나타난다. 즉 근정전 앞 계단까지 이어지는 돌출된 중앙길이 바로 왕이 다닐 수 있었다. 왕 이외의 신하들은 왕도 양쪽의 낮은 길로 통행을 하였으리라.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왕도가 있어도 여행, 답사에 왕도(王道)가 있던가?

그저  관련 서적 무식하게 많이 읽고 또 읽고 두 발로 걸어서 현장 답사를 하는것이 최고의 왕도이다.

  

 ▲ 근정정 앞의 품계석  ⓒ 2007 한국의산천

 

예절에서 말하는 동서남북은 자연의 동서남북과 관계없이 예절을 하는 장소에서 제일 윗자리(상석)가 북쪽이고 상석의 앞이 남쪽이며 오른쪽이 동쪽이고 왼쪽 서쪽이 된다.

 

궁중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문관(文官)우위사상이 있어 임금에게 조하(朝賀)드릴 때는 왕이 있는 쪽이 상석(북쪽)이며 왕의 자리에서 바라보아 동쪽에 문관을 서게 하고 서쪽에 무관(武官)이 섰다. 

 

조선시대 품계는 직품+관계

1품에서 9품까지 정·종 18관품으로 구성   
 
 조선시대 관료 사회의 품계란 말은 문무 백관의 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아울러 이르는 용어다. 1품에서 9품까지 정·종의 18관품으로 구성돼 있다. 대개 동반·서반·종친·의빈·내명부·외명부·잡직·토관직으로 구분했다.

 왕을 중심으로 동쪽에 배열한 문관을 동반이라 했고, 서쪽에 배열한 무관을 서반이라 했다. 동반의 경우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정3품 통훈대부 이하를 당하관, 서반의 경우 정3품 절충장군 이상을 당상관, 정3품 어모장군 이하를 당하관이라 했다. 그리고 동·서반 종6품 이상을 참상관, 정7품 이하를 참하관이라 불렀다.

 동·서 양반은 정1품에서 종6품까지는 각 관품별로 각각 두 개의 품계가 있었으며, 정7품 이하는 하나의 품계로만 구성되었다. 다만 종2품 이상 무반인 서반직의 경우는 동반의 품계를 따르도록 하였다.

 그 외 국왕의 친족인 종친, 왕족과 혼인관계에 있는 의빈, 궁중의 여인들을 이르는 내명부, 공주와 옹주, 종친의 부인, 문무관의 부인 등을 이르는 외명부, 의학·역학 등에 종사하는 잡직, 평안도와 함경도에 따로 설치한 벼슬자리 등을 일컫는 토관직 등도 각각의 품계를 지니고 있었다.

 관직 수는 한정되고 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수요 공급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행수법(行守法)’이었다. 행수법의 적용으로 직품과 관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

 행수법의 ‘행’은 계고직비(階高職卑·품계는 높은데 관직은 낮음)라 하여 그 품계에 맞는 관직보다 낮은 관직을 받는 것을 말하고, ‘수’는 계비직고(階卑職高)라 하여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한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관직자들은 행 과 수를 그 관품 앞에 붙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행 가선대부 이조 참의 ○○○’라고 할 때, 가선대부는 종2품이고 이조 참의는 정3품직이므로 원래대로라면 가선대부 품계에 맞는 참판직을 받아야 하나 그 보다 한 등급이 낮은 정3품의 참의 벼슬을 받았으므로 행을 앞에 붙여 실제보다 낮은 직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는 한정된 관직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기본 원리로 작용했다. 

 

 ▲ 근정전 ⓒ 2007 한국의산천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문무 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다. 그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 하여 넓고 높다. 중앙에 임금이 좌정하던 어좌가 있다. 
  

 


▲ 근정정 안에 있는 어좌(왕의 자리) ⓒ 2007 한국의산천

 

일월오봉병

어좌의 배경으로는 ' 일월오봉병 '이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의 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붉은 수간(樹幹)에 녹색의 무성한 잎을 가진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포말이 출렁이는 물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일월오봉병은 현재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하여,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창덕궁 인정전 등 각 궁의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쪽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그리고 신선원전 감실(龕室) 등 정전이 아닌 침전이나 선왕을 모시는 영전(靈殿) 내에 설치되어 있다.
오일월오봉병은 실내용 뿐만 아니라, 왕이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장소, 예컨대 전시(殿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 등 야외에도 왕의 주변을 장엄하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월오봉병'은 왕이 임하는 장소이면 어떤 곳이든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장엄용 그림이라 말할 수 있다

 

근정전의 내부와 천장
바깥에서 보기엔 중층이지만 안에 들어와 보면 훤히 트여서, 방전(方塼)을 깐 바닥에서부터 소란반자한 천장까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임금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장엄이다. 고주의 내진주(內陣柱)들이 용립하여 숲을 이루어 법전 내부를 깊은 듯이 의도하고 중앙간 고주 주간을 막고 어좌를 마련하였다. 

 

▲ 근정전안에 있는 칠보대향로 ⓒ 2007 한국의산천 

 

칠보는  황동(신주 청동..) 표면에 유리질을 입히는 기술이다. 과거 중국 도자기는 유럽 아프리카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유럽, 아프리카에서는 도자기를 수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모방하고 직접 만들고자 했으나 도자기의 비법은 유약에 있었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초벌구이만 한 도자기 처럼 음식물이 새거나 흡수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착안한 것이 유리질을 입히는 방법이고 그것이 칠보로 발전하였다. 그것이 이집트를 통하여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고 위의 칠보대향로는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선물을 한것이다.

 

 

근정전 상월대 위 양쪽으로 세 발 달린 향로모양의 청동제 정(鼎)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정의 밑받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 아래 팔각형모양과 그 위에 둥그런 원모양이 하나의 통돌로 다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의 쓰임새와 용도에 대해서는 향로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구체적인 사료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정의 일차적인 의미는 솥(鼎)을 뜻하지만, 왕권(王權)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하(夏)나라 때 우(禹)임금이 전국 아홉 주의 쇠를 모아 솥을 아홉 개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왕권을 상징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통한다.  

 

근정전의 내부와 천장
아래 위층이 구분되는 곳에 별창방을 돌리고 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雲宮)으로 치장하였으며, 아래로는 낙양각을 하였다. 법전 내의 텅빈 공간은 이 어좌의 장엄을 꾸미기 위한 의장물(儀杖物)들의 배설을 의도하고 설정한 것이어서 내부의 초점은 어좌에 있다. 아득하게 솟아오른 고주 위에서 대들보를 걸고 그 양 볼에 의지하고 우물천장을 꾸몄다. 우물천장 중에는 소란반자가 제일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만들었다. 반자틀과 소란과 청판에 아름답게 치장하는 단청을 하여서 올려다보면 장관을 이룬다. 중앙간 천장 중심부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따로 만들고, 거기에는 채운간(彩雲間)에서 여의주를 다루는 두 마리의 황용을 장식하였다. 왕룡은 비늘까지도 그대로 세각(細刻)하였다. 이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신과의 어떤 소통을 위한 대화로 보인다.
 

▲ 근정전 월대위에 있는 드므 ⓒ 2007 한국의산천  

 

드므

드므란 순 우리말로 국어사전에서는 '넓적하게 생긴 독' 을 뜻한다. 두무(豆撫), 길상항 (吉祥缸)'이라고도 한다. 

덕수궁이나 경복궁의 근정전의 월대 모서리에는 물을 담아놓았던 드므가 있다. 이는 당시 궁궐의 건축물이 대부분 목재로 되어 화재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고자 놓아둔 벽사(壁邪)시설로서 설치되었다고 한다.

 

드므는 주로 궁궐 앞에 설치하였고 물을 채워놓으면 침입해오던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고 믿었었다고 한다.

 

▲ 근정전 처마에 있는 잡상 ⓒ 2007 한국의산천

 

잡상(雜狀)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한 큰 전각의 지붕 위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자 장식한 취두(鷲頭) 치미, 용두(龍頭)와 잡상(雜像) 등이 있다. 여러가지 형상의 잡상이란 건강을 지키고 화마를 잠재우며 잡귀신을 물리치는 흙으로 만든 상징물이다.

  

근정전의 월대
대라고도 한다. 근정전을 높직하게 올려 세우기 위하여 상하 이층으로 돌기단을 구성했다. 근정전은 이 월대에 다시 첨계라는 외벌대 댓돌을 구성하고 건축되었는데, 월대의 뒷 부분 넓이보다 앞 쪽이 훨씬 넓게 되어 있다.

 

▲ 근정전 2단 월대와 난간 ⓒ 2007 한국의산천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위치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근정전 월대 남쪽면 중앙 상하에 각각 답도를 설치하였다. 답도 좌우로 좁은 계단석이 놓이고 그 끝에 큼직하게 소맷돌을 설치하여 큰 계단은 세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소맷 돌은 해태가 허리를 펴고 길게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었고, 답도에는 게풍 사이에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 좌우 층계석 전면에는 당초무늬가 부조(浮彫)되었다. 좌우로 해태와 같은 벽사의 신이 강 역을 수호하여 주는 가운데 넝쿨같이 어울려 사는 백성들이 봉황 같은 왕족을 중심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 근정전과 경회루로 나가는 중간에 있는 긴 회랑과 문 ⓒ  2007 한국의산천

 

 ▲ 경회루 2007 한국의산천

 

경회루 (국보 제224호)
경복궁 창건시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을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가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자리엔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경복궁 재건시에 경회루도 중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 

 


 
경회루의 불가사리
옛날부터 불을 잡아먹는 불가사리란 짐승이 살았다고 한다. 목조건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기(火氣)인바, 경회루의 돌난간에 이 불가사리를 세워 불길의 접근을 막았다. 6.25 때 포탄파편이 난비한 중에서도 경회루가 무사하였음은 불가사리 덕분이라고 하는데, 불가사리 자신은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제몸으로 경회루의 재앙을 막은 것이다. 이 밖에도 경회루의 돌다리와 난간에는 여러 서수상(瑞獸像)들이 조각되어 있다.
 
 경회루 방지(方池)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침전의 서쪽에 연결된 원지(苑池)로서 잔치도 하고 뱃놀이도 즐기며 때로는 외교사절을 영접하던 곳이다. 방지의 규모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이며, 못 속에 장방형의 섬이 세 개 있다.

동쪽의 큰 섬에는 세 개의 아름다운 돌다리를 설치하고 웅장한 경회루를 건립하였다. 경회루가 있는 이 섬의 둘레와 돌다리의 좌우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를 세우고 돌란대를 설치한 돌난간이 돌려 있고, 다리 앞뒤와 난간이 꺾이는 곳에는 해태석상을 배치하고 있으며 배를 타는 선창 시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이런 용두는 북쪽 지안(池岸)에도 하나 있다.  


 1506년 연산군 시대 기록을 보면,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어 화려한 꽃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 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또 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용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못의 서쪽과 북쪽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숲이 있었다. 경회루 방지는 조선시대 원지(苑池) 중에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조형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꼽힌다.

 ▲ 사정전 ⓒ 2007 한국의산천 

 

사정전  

사정전(思政殿) 근정전의 바로 뒤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왕이 공식집무를 보던 편전(便殿)으로 쓰였다. 뿐만 아니라 사정전에서는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거나 종친,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사정전'이란 이름은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백성의 뜻을 헤아린다'라는 뜻이 있다.

 

근정전의 뒷 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 되었는데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 서쪽에 천추전, 남행각에 사정문, 서행각에 종현문이 있었다. 
 
사정전 벽의 용그림
왕궁을 용궁, 왕의 의자를 용상, 왕의 부채를 용선, 왕의 얼굴을 용안, 왕이 타는 가마를 용가, 왕이 입는 옷을 용포라고 하듯이 용은 왕을 상징한다. 따라서 왕이 정사를 보는 동안 머무는 이곳에도 용그림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전지 넉장을 이어붙인 화폭에 수묵과 채색을 써서 두 마리의 용을 그린 쌍용도가 있는데 이 쌍용도의에 있는 용의 발톱은 넷이고 쌍룡은 모두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 사정전 앞에 있는 해시계 앙부일구 ⓒ 2007 한국의산천 

 

앙부일구

사정전 앞에는 앙부일구라 불리는 해시계가 있다. 일구는 해시계란 뜻이고, 항아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앙부라고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앙부일구는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려주는데 해가 뜨지 않는 밤에는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 왕의 침소인 강령전 ⓒ 2007 한국의산천 

 

 강녕전 (왕의 침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강녕전은 정면 11칸,측면 5칸 규모로 초익공의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이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건물이라 용마루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 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 왕비의 침소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구중궁궐 ⓒ 2007 한국의산천

 

▲ 왕비의 침소 교태전 ⓒ 2007 한국의산천 

 

교태전

교태전에 용마루가 없는 점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같으나, 교태전에는 강녕전에 있는 월대(月臺) 대신에 정면 세 곳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교태전(交泰殿)은 경복궁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있는데, 이는 이 건물이 왕비의 침소이자 내명부와 궁궐 안의 여성문제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업무를 주관하는 집무 공간이기 때문이다. 

교태전은 세종 22년(1440) 무렵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의 경복궁 재건 당시에 중건되었다. 하지만 1917년의 화재로 소진된 창덕궁 내전 전각을 중건한다는 구실로 헐려 창덕궁 대조전의 부재로 쓰이고 지금의 교태전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교태전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데, 이런 지붕을 무량각(無樑閣)이라 하며 왕과 왕비의 침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건물이라 용마루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부속건물이 강녕전에서는 분리되어 있지만, 교태전의 경우에는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뒤로 이어져 있어 공간 활용이 강녕전보다 훨씬 내밀하며 건물 곳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장식들은 이 건물이 왕비의 침소임을 짐작케 한다.

 

▲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 2007 한국의산천 

 

▲ 교태전의 후원 ⓒ 2007 한국의산천 

 

 ▲ 교태전의 후원 아미산에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 십장생 굴뚝.ⓒ 2007 한국의산천 

 

 ▲ 선장문 앞의 굴뚝  ⓒ 2007 한국의산천

 

 ▲ 교태전 담장의 꽃문양

 

교태전 뒷뜰로 가는 도중에 있는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꽃문양,  화려하면서도 그윽한 기품이 넘쳐 난다. 갖가지 꽃이 오밀조밀하게 장식되어 있는 이 꽃담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아름다운 꽃밭을 직접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 자경전 ⓒ 2007 한국의산천

 

자경전 (보물 제809호) 
교태전 동쪽 자미당(紫微堂)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좌대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다. 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년(1888)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고종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 室形)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  자경전의 청연루의 처마 ⓒ 2007 한국의산천


자경전 동쪽 끝에서 한 칸이 앞쪽으로 두 칸 돌출하였다. 높직한 흘림의 방주에 의지하고 돌출 부분의 나무 기둥들이 섰다. 이렇게 돌출 구성되는 다락을 내루라 한다. 정면 1칸 측면 2칸, 정면 1칸 측면 1칸 또는 정면 2칸 측면 2칸, 혹은 정면 2칸 측면 1칸등으로 구성되는 수가 많은데, 여기에선 정면 1칸 측면 2칸의 법식을 채택하였고, 지붕 처리를 고려하여 팔작지붕 합각이 앞쪽을 향하게 하였다.
 


 ▲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호) ⓒ 2007 한국의산천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 (보물 제 810호) 

자경전 뒤편에 있는 십장생이 그려진 굴뚝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으로 제일 상단에 연가(燃家 굴뚝)가 10개이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小累) 및 창방(昌枋) 서까래 모양의 전돌을 따로 만들어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꽃담처럼 담에 붙여서 만든 굴뚝으로, 너비 381센티미터, 높이 236센티미터, 두께 65센티미터이다. 굴뚝벽의 상단 중앙에 나티(짐승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문전으로 박고 좌우에 학문전(鶴紋塼)을 박았다. 그 아래 중앙벽 구간에 해, 산, 구름, 바위, 솔, 거북, 학, 바다, 사슴, 포도, 연꽃, 대나무, 불로초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밑에 불가사리 두 마리를 전(塼)으로 만들어 박았다. 그리고 굴뚝의 좌우 좁은 벽면에는 박쥐문과 당초문이 배치되었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굴뚝은 조선시대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자경전 꽃담
자경전의 서쪽 담은 주황색의 전(塼)으로 축조한 꽃담이다.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格子紋), 육각문(六角紋),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 자경전의 아름다운 꽃 담장 ⓒ 2007 한국의산천

 

 ▲ 정교하게 조각된 꽃무늬 ⓒ 2007 한국의산천

 

  ▲ 자경전 서쪽의 아름다운 꽃 담장

 

 ▲ 풍기대 (보물 846호) ⓒ2006 한국의산천     

 

조선시대에 풍향(風向)을 관측하기 위해 설치한 받침돌로서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풍기죽(風旗竹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24방향으로 풍향을 측정하였는데, 1770년(영조 46)에 만든 풍기대가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에 각각 남아 있다. 

 

 ▲ 향원지를 둘러보고 민속박물관으로 이동하는 관광객 ⓒ 2007 한국의산천 

 

 ▲ 국립 민속 박물관 ⓒ 2007 한국의산천

 

 ▲ 열상진원 ⓒ 2007 한국의산천

 

열상진원 (烈上眞原)

 경복궁 내 향원지 북쪽 함화당 후원에 위치한 샘물.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복궁 창건 때부터 샘솟고 있다는 샘으로 샘솟은 물이 한바퀴 돌아 연못으로 흘러들어간다.

경복궁 창건(1395년)부터 있었던 왕궁의 샘으로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하였다. 샘에서 솟은 물이 내려와서 한바퀴 돌아 두 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지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는 향원지에 비친 나무나 정자의 그림자가 이 물의 흐름으로 인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와 또한 물고기들이 차가운 물에 의해 놀라지 않도록 하는 배려라고도 전한다. 

 

 ▲ 경복궁 향원정 ⓒ 2007 한국의산천

 

향원정(香遠亭)  
함화당의 북쪽에 장안당이 있다. 이 집의 북행각은 북쪽 궁성에 가까워서 북행각의 문을 나서면 궁성의 암문(暗門)인 계무문(癸武門)에 이르렀었다. 이 장안당 동편에 곤영각(坤寧閣)이 있고 그 북쪽에 복수당(福綏堂)이 있었는데, 이 집 남행각의 문밖 즉 건청궁의 남쪽에 연못이 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향원지와 취향교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노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 비 내리는 향원지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향원지에 모인 관광객 ⓒ 2007 한국의산천

 

지금까지 소개한 그 외의 주요 건축물

 

천추전 
사정전의 서쪽에 있고 동편의 만추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만춘전은 고종 4년에 사정전과 더불어 중건 되었다. 임란 이전의 천추전은 문화창조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이 전각을 즐겨 이용하였다. 또한 이 전각에서 1452년 문종이 승하하였다. 천추전은 평면이 24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공포는 무익공이고 기둥 높이는 9자이다. 사정전의 기둥 높이가 15자이고 공포도 내7·외5포의 다포계로 격조를 한껏 높인 것에 비하면 아주 조촐한 법식에 따라 지었다.
  
만춘전 
사정전 서쪽의 천추전과 똑같은 규모로 동쪽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6.25 때 피해를 입어 댓돌 위에 기둥을 세웠던 주초석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8년 옛 모습대로 재건했다. 사정전에 비하면 그 양식이나 수법이 검소하게 꾸며졌다.

 

자선당
'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에 보면 '자선당은 륭문루 남쪽에 있는데 동궁이 서연(書筵)으로 쓰는 곳이다'하여 임진왜란 전후의 위치가 달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북궐도형>에는 자선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합 28칸이고 중앙부 6칸은 대청, 좌.우 2칸씩은 온돌방이며 둘레의 툇간은 방, 퇴로 구성되었다.
 

수정전 
세종 때 경회루의 남쪽, 천추전의 서쪽에 보루각과 흠정각, 집현전을 지었는데, 이 전각들이 임진왜란 때 불타자 그 자리에 고종 4년 수정전을 중건하였다. 규모가 40칸으로 현존하는 경복궁내의 전각으로는 가장 칸수가 맣다. 동복도 13칸, 서복도 9칸과 동행각 33칸, 서행각 33칸, 남행각 30칸, 북행각 30칸, 중행각 22칸, 동외행각 20칸, 서외행각 20칸반의 행각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로 사용된 바 있고, 1895년 1월부터는 내각청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 이웃에는 대전장방, 내반원, 수날간, 정원, 보청, 선전관직방, 검사청, 옥당, 약방, 의관방 등의 건물이 즐비하였다. 지금은 수정전만이 홀로 남아 있다. 
 
영추문 
동쪽이 봄이면 서쪽은 가을이다. 궁의 서문은 가을을 맞는다고하여 영추문이라 이름지었다. 원래 문밖에 명당수가 흐르는 맑은 개울이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다. 문안에 수문장청, 소궁청, 직소, 루국(漏局), 내사복이 있고, 궁의 담 끝에 서십자각이 있었다. 홍예문이 하나 열린 육축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195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했다. 
 
건춘문 
경복궁의 동문(東門)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육축을 높이 쌓고 중앙에 홍예문 하나를 열었다. 공포는 이익공이며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기와를 이은 우진각이다. 
조선조의 척도인 영조척(營造尺)으로 홍예 높이 16.5자이고, 너비는 15자이다. 이는 15자 사방의 정방형에서 그 대각선 길이 16.5자를 홍예의 높이로 설정한 수치인 것이다. 이간통(二間通)의 3칸인데 기둥 높이 8자이고, 3칸 중 중앙칸은 17자, 좌우협간은 8자로 합계 33자이다. 이때의 측면 2칸의 간살이 넓이는 각각 8자 2치 5푼식으로 합계 16자 5치가 된다. 긴 변과 짧은 변과의 비례 설정에 따른 계산에서 채택된 수치들이다.
 

건춘문의 육축과 계단
궁성보다 높게 육축을 쌓고 홍예 위에 문루를 올려세운 구조여서 필요에 따라 수문장졸들이 문루에 올라가야 할 때 좌우에 설비된 돌층층다리를 이용하게 된다. 층층다리는 급한 경사로 마치 사다리처럼 구조되었는데, 안전도를 고려해서인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협문이 있고, 협문은 육축 가장자리에 쌓은 여장(女墻)에 이어져 있다.

 
함화당 
집경당의 서쪽에 있으면서 서로 내부에서 왕래할 수 있게 구조된 복도삼간으로 이어져 있다. 규모는 17칸이고 2칸의 내루가 있는 오량집이다. 옛날엔 복도 남쪽에 샛담이 있고 계명문이라는 일문과 영춘문이라는 월문이 있었다. 또 서행각 8칸과 남행각 11칸, 외행각 13칸이 있었고, 영지문(迎祉門)·창무문(彰武門)이 일각문으로 열린 간장(間墻) 들이 더 있었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함화당만이 남아 있다.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집경당 
집경당은 함화당과 침전 중의 하나이던 흥복전에 예속된 건물이다. 아미산의 북쪽에 흥복전 일곽이 있고, 그 북쪽에 광원당이, 광원당 북쪽에 집경·함화당이, 그 이웃에 영추당이 있었으나 다 없어졌다. 지금은 집경·함화당만이 남았다. 경복궁에 총독부박물관을 지을 때 집경당과 함화당이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집경당은 28칸반 규모의 이간오량집으로 내루가 있으며, 동행각은 6칸에 봉양문(鳳陽門)이 있고, 서행각은 5칸에 백양문이 있으며, 남행각은 10칸으로 향명문(嚮明門)이 있고, 북행각은 9칸반, 반반각이었다. 그 북쪽 담장에는 일각문인 응복문(應福門)이 있어 서쪽의 함화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집옥재
고종 10년(1873)에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함께 창건한 건물로 추정된다.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은 고종 28년(1891)7월 이후였고,고종 30년엔 집옥재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한 바 있다. 집옥재는 높은 댓돌에 큼직한 삼구의 석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첨계일급을 더 설치하여 고형(鼓形)주초석에 둥구리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20간이고 집은 맞배지붕형이며 좌우 박공 아랫벽은 반전(半塼)으로 초담을 쌓았다. 마치 중국집의 구조 같은 벽돌담이다.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으로 고종 2년(1865) 중건 되었다.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할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 하는데 6.25동란 때 문루의 일부가 파손되어 보수 하였으며 <고종실록>에 의하면 현판 서사관(書寫官)은 이현직(李顯稷)이라한다. 단간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를 세웠으며 2익공 양식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었다. <경복지>에 의하면 건춘문.영추문.신무문은 그 홍예의 높이와 폭, 문루의 평면과 주칸 등이 모두 같은 규모로 되어 있어 정문인 중층의 광화문을 제외하고는 이들 세 문은 모두 규모나 가구.구조수법(架構.構造) 등을 같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 하였습니다.[한국의산천]

 

입장시간 

3월 ~10월 09: 00~17:00

5월 ~ 8월  09 :00~18 :00

11월~2월  09 :00 ~16 : 00

 

입장료

어른 3,000원 단체 (20인 이상) 2,400원  청소년 1,500원

경회루 특별입장료 : 5,000원

주차료 : 1시간당  2,000원  

대중 교통 :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5번 출구.

 

경회루, 교태전, 자경전 상세 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892616 

향원정, 풍기대 열상진원 상세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892852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원정 열상진원 풍기대  (0) 2007.07.01
경회루 교태전 자경전  (0) 2007.07.01
관광공사 추천 7월 여행지  (0) 2007.06.27
덕산기 오지답사 1  (0) 2007.06.24
덕산기 오지답사 2  (0) 2007.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