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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어부사시사

by 한국의산천 2007. 4. 14.

거센 봄바람이 잠잠해진 토요일 출근 길

화창한 봄날 흥부 저수지를 지나며 낚시하는 풍경을 보니 어부사시사가 떠올랐다.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공부하며 관련 된, 준비해 놓은 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봄편 소개

2007. 4. 14일. 토요일  [ 한국의산천 ]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고산 윤선도는 인조 6년(1628) 별시문과의 初試에 장원한 후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을 가르치는 왕자사부와 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고산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병자호란 후에는 낙향하여 해남 수정동과 금쇄동의 대토지와 완도의 보길도 전체를 소유하면서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 및 국문학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현종 12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봄편 

 

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해 비췬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江村) 온갓 고지 먼 비치 더옥 됴타

 

 

ⓒ  2007. 한국의산천

 

날이 덥도다 믈 우희 고기 떳다 닫 드러라 닫 드러라 
갈며기 둘식 세식 오락가락 하느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낫대는 쥐여잇다 탁쥬병(濁酒甁) 시럿나냐
 

 

 

 ▲ 영흥도 가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돋 다라라 돋 다라라
동호(東胡)를 도라보며 셔호(西湖)로 가쟈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  2007. 한국의산천

 

우는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 숩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漁村) 두어 집이 냇속의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나다 

 

 

ⓒ  2007. 한국의산천

 

고은볃티 쬐얀는듸 믉결이 기름갓다 이어라 이어라 
그믈을 주어두 낙시를 노흘일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의 흥이 나니 고기도 니즐로다 
 

 

ⓒ  2007. 한국의산천

 

셕양(夕陽)이 빗겨시니 그만하야 도라 가쟈 돋 디여라 돋 디여라 
안류정화(岸柳汀花)는 고비고비 새롭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공(三公)을 불리소냐 만사(萬事)를 생각하랴 

 

 

ⓒ  2007. 한국의산천

 

방초(防草)를 발와 보며 난지(蘭芷)도 뜨더보쟈 배 셰여라 배 셰여라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시른 거시 므스것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갈 제는 내뿐이오 올 제는 달이로다 

 

 

ⓒ  2007. 한국의산천

 

취(醉)하야 누얻다가 여흘 아래 나리려다 배 매여라 배 매여라 
락홍(落紅)이 흘러오니 도원(桃源)이 갓갑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세홍딘(人世紅塵 )이 언메나 가렷나니 

 

 

ⓒ  2007. 한국의산천

 

낙시줄 거더 노코 봉창(蓬窓)의 달을 보쟈 닫 디여라 닫 디여라 
하마 밤들거냐 쟈규(子規)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나믄 흥(興)이 무궁(無窮)하니 갈 길흘 니젓딷다 

 

 

ⓒ  2007. 한국의산천

 

내일(來日)이 또 업스랴 봄밤이 몃 덛 새리 배 브텨라 배 브텨라 
낫대로 막대 삼고 시비(柴扉)를 차자 보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 생애(漁父生涯)는 이렁구러 디낼로다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1587-1671)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글로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일인자로 꼽힌다.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있다. 

그는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 다. 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 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 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 (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 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과 시름과 흥, 원(願)을 시문(詩文)으로 풀어낸다.

 

고산의 일생

고산은 본관이 해남윤씨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다. 고산은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을 살지못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당시는 이이첨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못하였으며 광해군에 아첨하는 권세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의 간신들의 모함으 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돼 6년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지만 유배후의 심정이 정리되지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는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때 출사의 꿈이 펴진다.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 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 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유배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뒤 1671년 6월 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향년 85세로 파란많은 생을 마감한다. 

 

 

고산은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음을 알 수있다.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의 생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으로 교차된 삶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문학적으로 매우 뜻깊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래서 그를 평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문학이다. 

 

그는 몸집은 작고 체질도 연약한 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엄숙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가진 꼬장꼬장한 선비였던것 같다. 이러한 그가 평생을 통해 쏟아낸 엄청난 시구로 인해 한국의 국문학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윤선도는 그의 창작산실이 거의 유배, 은둔지였던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인 배경을 비롯 그 공간에서 처하게 된 동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산이 택한 은거지는 크게 현산면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였다. 현산은 첩첩산중 육로를거쳐 찾아야 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할 해중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된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 만안리에 있는 금쇄동과 수정동, 문소동으로 이곳에서 약 10년을 번갈아 머물며 '산중신곡' '금쇄동기'등의 작품을 쏟아냈고 보길도의 부용동에서는 일곱차례에 걸쳐 약 12년간을 풍류하며 살았다  

 

 

고산문학의 성격

고산의 문학은 크게 3기로 구분된다. 함경도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 '견회요''우후요'로 대표되는 초기와 해남의 금쇄동과 완도의 보길도 등지에 머물며 지은 산중신곡,산중속신곡,어부사시사의 중기 그리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서 지은 '몽천요'로 대표되는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의 작품이 현실참여가 박탈된 유배지에서 지은것이라면 중기에는 은거지에서 이상적인 절대공간을 노래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처한 공간에 따라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동경과 갈망 자연에의 안주와 몰입등의 상반된 욕구가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고있다. 

 

해남은 그의 음영짙은 내면풍경과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며 그의 생애와 시문학은 이곳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현산면 금쇄동에서 지었던 오우가를 보면 이시에 등장하는 물(水),돌(石), 소나무(松),대나무(竹).달(月)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물은 흘러가는 물이 아니며 달은 세상 만물을 비춰주는 만인의 달이 아니다.

물과 바위,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정원, 그리고 달은 한정적으로 그 정원을 비춰주도록 조직돼있다. 고산의 자연은 은거가 현실적 욕구의 좌절을 위로하여 주는 기능을 담당하는 심리적 피난처였다. 초기의 은거가 이러한 일반적인 은자의 모습을 지니는데 비해 후자의 은거는 좌절의 극복을 심리적으로 자연에 숨기는 것으로 나타나 더욱 절제되고 심오한 시세계를 보여준다. 

 

다산 정약용과 외가

다산에 대해 말할 때 외가집 해남윤씨와의 인연은 결코 빠트릴 수 없다. 외가와 같은 남인계로서 서울에서 벼슬살이 할 때나 강진에서 귀양살 때 외가와 많은 교류를 했고 또 빈번한 도움을 받았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 윤씨는 1770년 (영조 43년) 정약용 선생이 9세때 사망하였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해남의 부호 해남 윤씨가의 딸이었다 해남 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의 정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처가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후 이 재력을 바탕으로 고산과 공제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거느리는 하인들만해도 수백명에다 보길도 섬을 통째로 소유하고 해남지방에 세운 정자만도 25개나 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던 해남윤씨의 世居地와 인접한 강진에서 귀양을 살았던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는 유배생활 중 해남윤씨 가전(家傳)의 서책을 손쉽게 열람하고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1808년 봄 정약용은 다산(茶山)으로 이주 했다.(1790년 서산군 해미현으로 유배 11일만에 돌아 옴. 1801~1818 경상도 장기로 유배 다시 전남강진으로 유배) 다산은 강진현 남쪽의 만덕사(백련산 만덕사) 서쪽에 있는 처사 윤단의 산정(山亭)이었다. 이곳에 와서 정약용은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이곳에서 꽃과 나무를 심고 윤단을 비롯한 외가쪽 사람들에게서 서적 1,000여권을 빌려 쌓아 놓은것이 다산을 뿌듯하게 했다고 전한다.    

 

 

공제 윤두서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 선생 어머니의 아버지, 즉 다산 선생의 외할아버지이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시조,서예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에도 뛰어났었다  

 

 

 

ⓒ  2006. 한국의산천

 

살랑 살랑 봄바람

동풍이 건듣부니 길 떠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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