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과 바우덕이
불꽃처럼 살다가 23세 꽃다운 나이에 바람처럼 사라져 간 바우덕이
답사 [2007. 1. 14. 한국의산천]
답사 코스 안성 석남사 - 서운산 - 좌성사 - 청룡사 - 바우덕이 사당- 바우덕이 묘
▲ 남사당패의 근거지 였던 서운산 청룡사 ⓒ 2007. 한국의산천
안성안성은 예로부터 기름진 옥토와 안성 맟춤 유기그릇으로 유명하며, 고을 이름 자체도 편안한 안(安), 마을 성(城), 안성(安城)이 아닐까요?
놋쇠로 만든 반짝 반짝 빛나는 그릇을 유기라고 합니다. 오랜 옛날부터 안성에서는 식기류와 반상기 및 제향에 필요한 제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용구를 많이 만들었는데 안성의 유기는 제작기법이 매우 발달되어 모양이 아름답고 정교하여 '안성마춤'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는 확고한 자리를 잡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남사당 (男寺黨)이란 조선시대때 춤과노래 등 흥행적인 놀이를 가지고 떠돌아다니며 기예를 펼친 유랑예인 집단을 말한다.
▲ 안성 서운산의 이정표 ⓒ 2007. 한국의산천
▲ 배티고개 ⓒ 2007. 한국의산천
안성에서 진천으로 넘어가는 배티고개. 서운산에서 칠현산으로 이어지는 금북 정맥을 넘어간다.
▲배티성지 입구 ⓒ 2007. 한국의산천
배티재를 넘어 진천 방향으로 가면 배티성지가 나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인근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으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금북정맥의 산간 지대로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의 경계가 되는 고개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고개’로 불리다가 이치(梨峙)라는 한자로 표기하고 그 훈독인 배티로 굳어지게 되었다.
▲ 배티성지 ⓒ 2007. 한국의산천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종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와 피정의 집으로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다.
1870년부터 다시 신앙이 싹터 1884년에는 선교사들이 진천에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등 5곳에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 현재 이곳 배티에는 신자들이 생업을 영위하던 옹기점과 무명순교자의 묘 만이 남아있다.
▲ 안성 서운산 주변에는 참숯가마가 많다 ⓒ 2007. 한국의산천
▲ 얼어버린 청룡 호수 ⓒ 2007. 한국의산천
겨울은 강철로된 무지갠가 보다.
▲ 청룡사 대웅전과 보리수 ⓒ 2007. 한국의산천
청룡사는 1256년(고려원종6년)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가 창건하였고, 당시에는 대장암(大藏菴)이라 하였으나 1364년(고려 공민왕13)나옹화상이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청룡사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사당패의 근거지 이기도 했는데, 황석영의 대하소설'장길산', 김윤배의 장시'사당 바우덕이'는 청룡사의 사당골에 터를 잡았던 사탕패를 소재로 삼고 있다.
몇해전 드라마에도 방영된 적 있는 장길산의 연인 묘옥이 끼어있는 고달근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남사당패는 불당골에 살면서 겨울을 뺀 세 계절동안 전국을 돌다가 겨울에는 돌아와 기예공부를 익혔으며, 청룡사 사적비에서 부도군을 지나쳐 시멘트길을따라 올라가면 제법 산중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불당골도 볼거리이다.
▲ 남사당이 머물던 불당골에 세워진 바우덕이 사당 ⓒ 2007. 한국의산천
바우덕이와 청룡사
이 청룡사는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는데, 불교사적으로보다 민속사적으로 더 유명한 절이다. 한 때는 남사당패의 본거지이기도 하여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사찰로 유명한데 안성이 남사당의 본고장이라면 이 청룡사는 그 남사당패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 남사당패들은 이 청룡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절에서 발급해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과 전국의 저자거리를 떠돌며 기예를 팔아 먹고사는 천민집단이었다. 백여 년 전 안성에는 개다리패, 심선옥패, 오명선패, 안성복만이패, 이원보패, 안성원육덕패 같은 남사당패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우덕이"패였다고 전한다.
바우덕이는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유일한 여성꼭두쇠였는데 미모가 뛰어나서 많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미모 뿐만 아니라 소리가락 솜씨도 일품이었으며 특히 바람에 휘날리는 듯 하는 줄타기 솜씨가 당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로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다.
조선시대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했으며, 5세때 안성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했다. 15세때 안성남사당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 바우덕이 사당 ⓒ 2007. 한국의산천
바우덕이(金岩德: 한글 풀이 이름 "바우덕이"라 불렸다)는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현장에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하여 뛰어난 기예(技藝)를 선보였으며, 이에 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과 옥관자를 하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쳤다. 가녀린 처녀의 몸으로 그 많은 남사당패 식솔들을 이끌어 가기가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바우덕이는 1870년 폐병에 걸려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2007. 한국의산천
바우덕이 연보
1848.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1853.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당시 5세)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1863.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1865.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1865. ∼ 1870.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1870.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
▲ 바우덕이의 동상(?) ⓒ 2007. 한국의산천
미인은 박명인가?불꽃같은 생을 살다가 23세의 꽃다운 나이로 바람처럼 사라져간 바우덕이를 바라보니,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이매창 (1573년 선조 6년~1610년. 38세로 세상을 떠남)의 생애가 다시금 떠오른다.
▲ 청룡리 골짜기 입구에 있는 바우덕이 묘 ⓒ 2007. 한국의산천
안성 남사당패에서는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꼭두쇠가 되어 불멸의 예술을 남겼던 바우덕이묘는 천민이라 죽어서도 마땅한 땅을 허락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일부 학자들은 사당패 등 천민들은 수장을 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바우덕이도 역시 수장되었으면 무덤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저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와 어릴 적 경험을 떠올리며 물이 바위에 굽이쳐 흐르는 곳에 있는 양지편에 바우덕이의 무덤이 있다고들 했다.
그리고 바우덕이는 냇가 옆의 하천 바닥에 묻었는데 큰 홍수가 나서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가서 무덤을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냇가 옆의 바위 위쪽에 무덤의 형태로 보이는 조그마한 언덕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다른 여타의 무덤 흔적이라곤 없었으므로 마을 분들의 의견을 들어 이것이 바우덕이묘라고 결론지었다.
다시 무덤을 가꾸기 시작했다. 허물어 내린 봉분은 흙을 더 쌓아주었고 없었던 무덤 날개도 마련해 주고 제를 올릴 수 있도록 제단석도 갖추었다. 잔디도 심고 풀을 뽑아주었다. 무성했던 잡목도 베어주었다. 이렇게 했더니 하천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따뜻한 양지바른 바위 위에 자리한 푸근하고 제법 어여쁜 무덤이 되었다.
▲ 개울과 산자락 사이에 앉아있는 바우덕이 묘 ⓒ 2007. 한국의산천
쌀쌀한 날씨지만 남향의 산자락 끝에 앉아있어,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감도는것을 느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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