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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by 한국의산천 2006. 12. 10.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2006. 12. 10. 르포라이터 한국의산천 우관동]

 

 

 

위치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일대( 추사고택 관리사무소 041 - 330 - 2553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조선조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이 들어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서화가·금석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가 추사 김정희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慶州)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제가의 문하생으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신례원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가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추사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충청도 53현에서 한 칸씩 지은 53칸 집이었으나 행랑채 19칸이 손실되어 현재 34칸만 남아있다. 추사고택은 앞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지고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는 명당 터에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안채와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다.

 

 

 ▲  넓은 내포벌을 지나 추사 고택으로 가는 길ⓒ 2006 한국의산천 

 

 

 ▲  추사 김정희 고택 대문 전경 ⓒ 2006 한국의산천 

 

 

 ▲  안내소 옆에 있는 안내도 ⓒ 2006 한국의산천 

 

 

 ▲  주차장. 이 돌비석 뒤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 2006 한국의산천 

 

 

 ▲  고택의 대문 ⓒ 2006 한국의산천 

 

 

 ▲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조화롭게 건물이 구성되어있다.ⓒ 2006 한국의산천 

 

 

 ▲  기둥마다 주련이 있다.ⓒ 2006 한국의산천 

 

 

 ▲  사랑채 ⓒ 2006 한국의산천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정원의 모란을 배경으로 석년이 새겨진 돌기둥 ⓒ  2007 한국의산천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이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것을 각자한것이다.   

  

 

 ▲  사랑채 ⓒ 2006 한국의산천 

 

 

 ▲  대문(오른쪽)사랑채(왼쪽) ⓒ 2006 한국의산천  

 

 

 ▲  사랑채 문위에 걸려있는 세한도 ⓒ 2006 한국의산천 

 

대문을 들어서면서 사랑채에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이 걸려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뜻하는 세한도는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린 스승을 찾아온 역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빳빳한 털로 만든 그림붓으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없는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추사체로 쓴 발문이 그림의 격을 높여준다.

 

안내소에서 고급한지 복사본을 판매한다

 

 ▲  사랑채 내부ⓒ 2006 한국의산천 

 

 ▲ 사랑채  ⓒ 2006 한국의산천 

 

추사 김정희 고택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감도는 명당
(글 :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가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선생의 고택이 있다.
충청도에 산재한 많은 명택 가운데서 제일 먼저 추사 고택을 찾은 이유는 그가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를 통하여 조선 후기 예술의 정수를 국제사회에 보여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영·정조시대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끌던 세력 중심에 추사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을 논하려면 김추사를 비켜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서예관(書藝觀)을 피력한 바 있다.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문자향과 서권기는 그러한 인문적 교양을 함축한 말이다.


한자 문화권의 3대 예술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은 공통적으로 인문학적 지층이 두터워야 함은 물론이다. 온축된 학문적 바탕 없이 테크닉만 가지고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시서화 삼절 가운데서도 서(書) 부분이 특히 그렇지 않나 싶다. 시가 읽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畵)은 보는 예술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글씨(書)는 양쪽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예라고 하는 장르는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예술인 동시에 글씨마다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면서 감상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서예가 시와 그림 양쪽의 중도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보니, 한자문화권에서 상대적으로 시나 그림보다도 더욱 존중되었던 예술세계다.


아무튼 추사가 창안한 ‘추사체’ 서예는 서권(書卷)의 기(氣)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文字)의 향(香)이라고 하는 감성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 사회에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여겨진다. 요즈음 바둑의 천재 이창호가 천하제일의 끝내기로 삼국을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19세기에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그 문자향과 서권기의 품격으로 동양 삼국을 한바탕 풍미하였던 것이다.
 
 

 

 ▲ 사랑채를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 2006 한국의산천 

 

 

▲ 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를 주련(柱聯)이라고 한다.ⓒ 2006 한국의산천

  

 

▲  고희부처아녀손ⓒ 2006 한국의산천 

 

주련은 2개의 글귀가 모아져 하나가 되고, 추사고택 42개의 기둥에 추사가 쓴 글씨들을 붙여 놓은 주련 21개가 걸려있는데 그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글씨가 너무나 유명하다.

"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희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  안채의 처마 ⓒ 2006 한국의산천 

 

 

 ▲  안채 ⓒ 2006 한국의산천 

안채 뒤로 높은곳에 추사 사당이 있다.

 

 

 ▲  대문을 들어서며 바라 본 사랑채 ⓒ 2006 한국의산천  

 

 

 ▲  안채 ⓒ 2006 한국의산천 

 

 

 ▲  안채부엌에서 밖의 우물로 이어지는 옆문ⓒ 2006 한국의산천 

 

 

 ▲ 담장 밖에 있는 우물 ⓒ 2006 한국의산천  

 

 

 ▲  낮에 나온 반달ⓒ 2006 한국의산천 

 

 

 ▲  담장밖의 소나무 ⓒ 2006 한국의산천 

고택 안채에 나무 한그루조차 조경된 게 없다.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ㅁ자 모양의 집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괴로울, 부족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고 전한다.또 안채에는 난방용 부엌만 있다. 이것도 왕실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고 전해진다.
 

 

▲  안채 ⓒ 2006 한국의산천 

 

 

 ▲  사당으로 올라 가는 길(오른쪽)과 사당(정면) ⓒ 2006 한국의산천 

 

 

 ▲  높다란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주렁 주렁 매달려있다. ⓒ 2006 한국의산천 

 

 

 ▲  고택 왼쪽에 자리한 추사 김정희 묘역 ⓒ 2006 한국의산천 

 

 

 

▲  고택에서 백송으로 가는 길 중간 쯤에 있는 화순옹주 정려문ⓒ 2006 한국의산천 

 

추사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차녀)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한 열녀문이다.

영조는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이 죽은 후 딸인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히 이곳까지 내려온 영조가 딸에게 밥을 먹으라고 명했지만 뜻을 거스르고 굶어 죽는다.

그 당시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게 큰 죄이므로 정려문을 하사하지 않았는데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가 정려문을 하사해 임금의 핏줄로는 유일한 정려문이 이곳에 생겼다. 정려문 옆으로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월성위 묘의 비석이 어필이다. 

 

 

 ▲ 천연기념물 106호 백송ⓒ 2006 한국의산천 

 

 

 

▲  추사가 손수 심었다는 백송ⓒ 2006 한국의산천 

신기할 정도로 하얀 분가루를 칠을 한 듯 나무 몸통이 하얗다.

천연기념물 106호인 백송은 180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수행했던 추사가 연경에서 돌아오며 가지고 와 고조부 김홍경의 묘 입구에 심어놓은 것으로 옆에 있는 키 큰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수령이 약 200년이 되고 높이는 약 10m인 백송은 지상 50cm쯤에서 세 줄기로 갈라져 자랐지만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 남아있다. 전국에 5개 밖에 없다는 백송 천연기념물 중 영조가 하사해 서울 추사의 본집에서 자라고 있는 백송과 함께 추사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

 

 

 

추사 고택 가는 길

 
1)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 예산 - 덕산방면 - 수덕사방향
2)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서해대교 - 송악I·C - 국도32호선(신암) - 군도5호선(2㎞) - 군도7호선(2㎞) 

 

추사 고택가는 길은 서울과 경인 지역에서라면 두 길이 있다. 일단 예산까지 가야하는데,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천안~온양~예산 잇는 길이 있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당진 IC 와 해미IC에서 예산방향으로 접근한다 경부고속도로 천안IC에서 예산까지는 온양을 거쳐 신례원에 이르게 된다. 이 곳 신례원사거리를 놓치면 않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1.5km를 가면 계촌리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4.1km쯤 들어가면 추사 고택이다. 주차장은 넓은 편이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6시까지, 입장료는 어른 500원/청소년300원/어린이200원
주변명소 : 현충사,윤의사고택, 수덕사, 고건축박물관, 해미읍성,온양온천, 덕산온천, 도고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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