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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포구기행](22)영종도 예단포

by 한국의산천 2020. 1. 25.

 

[포구기행](22)영종도 예단포 

글 김연세·사진 김순철기자 입력 : 2009.10.16 04:00

 

강화도 임금에게 예단 드리러 가는 포구

 

 

가을날 오후에 찾은 예단포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가득하다. 오전 안개는 서늘한 바람에 밀려 온데간데 없다. 예단포 선착장과 마주한 장금도가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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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해가 만나 절묘한 빛깔을 자아내는 바다에 가을의 절정이 드리운다. 차가워진 물결이 짧아진 햇살과 만나는 서쪽바다엔 자연을 완상(玩賞)하는 사람들과 살 오른 물고기들이 한데 어울려 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걷히고 정오가 지나면 신혼으로 보이는 예쁜 커플들도 나루터로 나온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떨쳐버리는 중년 가장들의 모습도 들어온다. 입질 잦은 망둥이가 뛰노는 곳, 한적한 서해에 삼삼오오 서 있는 아마추어 강태공들과 고깃배, 갈매기, 섬들은 하나로 어우러져 여느 남쪽 바다 못지않은 풍경화를 그려낸다.


서울에서 간다면 인천공항보다 가까운 영종도 예단포에 간다면 새벽같이 일어나 서두를 필요도 없고 준비물도 필요없다. 배도 타지 않는다. 물이 빠지는 정오 즈음에 가면 족히 예닐곱 시간은 도시를 등져볼 수 있다. 굳이 배편으로 영종도와 예단포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인천 토박이들이 그렇다. 월미도에서 영종도선착장 구읍배터로 배를 타고 가면 고속도로로 돌아가는 것보다 빠르기도 하거니와 운치도 훨씬 더할 수밖에 없다.


바다 저편에 솟은 마니산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니산과 예단포구 사이에는 지금으로부터 777년 전의 역사가 녹아 있다. 몽고군이 침략하자 고려왕조는 서기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천도 이후 강화도가 성과 목책(방책)으로 완전 봉쇄됐을 때 육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고려왕실의 앞날은 위태로웠다. 이때 물 건너 예단포에서 물자와 병력을 공급하고 왕명을 8도 방백에게 지령함으로써 몽고대군을 상대로 무려 40년이나 싸울 수 있었다.

 

 

 

새우잡이용 어망을 준비한 한 낚시꾼이 잡은 새우를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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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단포’라는 지명은 ‘임금에게 예단을 드리러 가는 포구’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예담포 또는 여담포 등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로 향하던 프랑스군이 상륙해 여인들의 목을 쳤다는 소문에서 ‘여단포(女斷浦)’로 불리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와 몽고의 전쟁 중에도 망둥이는 숭어를 따라 뛰었을까…. 예단포의 한나절 내지 반나절 코스 여행객들은 망둥이몰이에 여념이 없다. 숭어와 바지락도 곧잘 잡힌다. 여름에 비해 몰라보게 굵어진 망둥이들. 이 녀석들은 10월에 먹성이 좋다. 복잡한 장비나 프로의 기술이 요구되는 바다낚시와 달리 여자들도 간단한 채비로 손맛을 볼 수 있는 대중적인 낚시다. 망둥이 낚시를 낚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나 예단포는 그런 아마추어를 더욱 반기는 듯하다.


한해살이 어종인 망둥이는 10월과 11월 사이 살이 가장 통통하게 올라 20~30㎝ 크기로 굵어진다. 낚싯대에 갯지렁이를 꿰어 담가놓으면 순식간에 파닥거리는 힘이 전달된다. 갯지렁이 대신 돼지비계를 미끼로 사용해도 된다.서울에서 놀러온 전모씨(48)는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괜찮은 바다가 있다는 게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회를 떠서 곧장 먹는 맛이 최곤데 소금구이 해먹어도 좋다”며 잡은 물고기 다섯 마리를 자랑한다.


바다 쪽을 바라보면 시야의 180도가 아닌 240도 가량이 물과 섬이다. 왼편과 오른편에 작은 섬 신도와 세어도가 있고 정면 저만치에 강화도가 우뚝 서있다. 그런데 예단포를 자주 방문했던 인천 사람이 지금 다시 찾는다면 애틋함이 더할 수밖에 없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사랑 때문일 터다.


시간이 멈춘 듯이 한가롭게 보여도 이곳은 사실 몹시 분주하다. 쇠락했던 포구에 망둥이가 늘어나 어선들이 다시 넘쳐나서가 아니다. “2년 전만 해도 공사 안 했는데…기분이 안 좋네요.” 아내에게 낚시질을 가르쳐주던 30대 남성은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려 공사장 흙으로 뒤덮여버린 포구마을 쪽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다쳐도 다 개발해버리면 아이들한테 뭘 물려 주죠?” 

 

 

개발 바람이 턱 밑까지 차 올라왔지만 영종도 한켠에 있는 예단포는 아직도 포구의 운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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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 전부터 집과 상점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포크레인과 대형트럭 등 공사용 중장비들만이 즐비하다. 운북복합레저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토목공사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인천 서구에서 왔다는 남모씨는 “이제 을왕리 해수욕장처럼 변할(행락시설이 들어설)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갯벌이 새빨갛게 돼서 칠게가 싹 다 죽었었어요. 지금 많이 나아진 겁니다.” 고깃배 선장 김모씨(54)가 하소연했다.


15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이곳 어민들은 건설업체가 지어준 컨테이너에 들어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의 어촌계장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선장 김씨는 포구 거주민이 아닌 세입자라는 이유로 보상을 못 받은 상태고, 어부 선모씨(56)는 변호사 비용 4000만 원 치르고 몇 백만 원 받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들의 표정에서 고기를 잡는 이들의 소박한 행복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포구 주변엔 이미 공군부8대까지 들어서 있는 만큼 아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송도 미사일 기지를 예단포로 옮기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마을에서 자연을 즐기는 와중에 개발과 환경보전 사이의 득실을 따져야 한다는 자체가 못내 서글프기만 하다. 해마다 약 100만 명이 방문하는 동북아 최고의 복합도시로 발돋움하고 4만 명의 고용 창출효과도 누리게 된다는 운북복합레저단지 개발 사업은 2014년까지 지속된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머지않은 옛날엔 풍어제를 준비했을 시기라고 한다. 마을 잔치로 해마다 열렸던 풍어제는 해마다 겨울 마을회의를 통해 결정해서 가구별로 부담금을 정했다. 소 한 마리를 제물로 삼아 풍악을 울리는 등 제법 큰 행사였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된 뒤 연평도에서의 어업이 금지되고 많은 어민들이 외지로 직업을 찾아 나가 마을 내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현재 마을 뒷산에 풍어제를 지내던 도구들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최근까지도 풍어제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으나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00년 이상 이어진 풍어제가 최근 중구의 지원을 받게 됐고 규모는 작지만 향토문화제로 열릴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운북동 복합레저단지 건설과 관련 건설사가 지어준 임시가옥들이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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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고종 때의 호구 기록에 의하면 예단포의 가구수는 125호로서 지금의 인구기준으로 약 4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획량이 번창하던 1930년대엔 가구수가 200호에 달했고 중선도 100여 척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시대에는 꽤나 번성한 마을로서 경찰서 주재소가 있어 무의도와 용유도까지 관할했다는 기록도 있다.


작가 박경태는 동화 <갯벌>에서 이렇게 썼다. “지호는 갯벌이 참 좋습니다. 뒤뚱뒤뚱 걷는 게 구경하기, 바지락 맛조개 캐기, 갯가재나 쭈꾸미 잡기, 밀물 들면 바위섬에 올라가 갈대낚싯대로 망둥이 낚기…” 주인공 지호는 “시간이 지나면서 갯벌에선 예전처럼 바지락이나 맛조개가 잡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놀 생각만 하던 어느 날, 지호는 학교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른들을 하나둘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지호는 묻는다. “왜 어른들은 갯벌을 없애려 하지요?”

     
예단포의 계절은 어느덧 가을을 거쳐 겨울로 치닫고 있었다. 갈매기들과 어우러진 예단포의 저녁놀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출처 : 경향신문

 

 

예단포 풍경 더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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