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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장가는 보내지 않겠소이다, 시집오라 하시오

by 한국의산천 2018. 8. 22.


"장가는 보내지 않겠소이다, 시집오라 하시오" 

chosun.com  


 

[박종인의 땅의 歷史]

"장가는 보내지 않겠소이다, 시집오라 하시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8.08.22 03:01 | 수정 2018.08.22 10:01


[133] 사위들이 만든 양동마을과 조선왕조 처가살이 청산 작전

 
 
박종인의 땅의 歷史
 
사위들의 마을 경주 양동

 다음은 경상북도 경주 양동마을 약전(略傳)이다.

 

  '고려 말 경기도 여주 땅에 살던 여강 이씨 이광호가

변란기를 피해 경주 땅 양동마을에 숨어 살았다.

그 손녀와 풍덕 류씨 류복하가 결혼을 하니,

사위 류복하는 양동마을 처가로 들어와 살았다.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 평정 공신, 월성 손씨 손소가 류복하의 딸과 결혼을 했다.

사위 손소 또한 양동마을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손소는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마을에 서백당(書百堂)을 지었다.

손소는 서백당에서 일곱 남매를 낳았다.

둘째아들 손중돈은 훗날 청백리가 되었다.


손소의 맏딸과 또 다른 여강 이씨 문중 사내 이번이 결혼을 했다.

사위 이번 또한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아들을 둘 낳으니 장남 이름은 이언적(1491~1553)이다.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 체계를 세운 공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고

명종 배향공신으로 종묘에도 위패를 올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사는 마을이다.'


경북 경주 양동마을은

이 마을에 장가 든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문중이 처가살이 하며 만든 마을이다.

여강 이씨 이언적은 성리학 체계를 만든 공으로 문묘에 배향됐다.

그를 기리는 옥산서원은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서원 문 저편에 서원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가 빛난다. /박종인 기자
 

  마침표와 쉼표를 포함해서 348글자, 열두 문장 속에

'사위' '처가'라는 단어가 세 번씩 나온다.

양동마을은 사위들이 만든 마을이다.

그때 조선 남자들은 웬만하면 여자 집에 장가가서 처가살이를 했다.

혈통을 따라가는 모계(母系) 사회였다.


고향을 그리던 여자, 초희


이언적보다 한 칠십 년 늦게 난 여자가

서울로 시집가 고향 강릉을 그린다.


'내 집은 강릉 돌무더기 갯가에 있어

문 앞 개울물에 비단옷을 빨죠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두고

짝지어 나는 원앙 부러워 바라보았죠

(家住江陵積石磯

門前流水浣羅衣

朝來閒繫木蘭棹

貪看鴛鴦相伴飛)' - '죽지사(竹枝詞)'


향수 어린 시를 쓴 시인은 허초희(許楚姬·1563~1589)다.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열일곱 살에 안동 김씨 문중에 시집가 스물일곱 살에 죽었다.

세간에 전하기로,

난설헌은 어릴 적 죽은 두 아들 추억과

술집을 전전하는 남편과 모진 시어머니로 인해 서럽게 살다가 요절했다.


강릉은 아버지 허엽 처가다.

어머니 강릉 신씨 친정이니 난설헌 외가다.

외가에서 나고 자랐으니 '내 집'이었고, 고향도 강릉이었다.

그렇게 처가살이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더니

'친정을 떠나' '시집을 가서' '친정을 그리다' 초희가 죽었다.


시어머니 사랑을 얻지 못했고 두 아들까지 잃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賢而有文章 不得於其姑 又喪二子 遂齎恨而歿). (허균, '성소부부고', 훼벽사·毁璧辭)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세상이 급변한 것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가는 언저리, 도대체 이 나라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남녀가 사귀겠다는데'


  조선 왕조가 건국되고 23년이 지난 서기 1415년 어느 날이었다.

전 중추원부사 조화(趙禾)가 죽고 과부 김씨가 이지(李枝)와 재혼했다.

 

사헌부에서 보고했다.

"김씨는 아름답고 음란하여 늙을수록 더욱 심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빽'이 들어와(夤緣得脫·인연득탈) 유배형밖에 못 줬음.

추가로 벌을 청함."


  태종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내 없는 남자와 남편 없는 여자가 서로 혼인하는 것을 어떡하란 말이냐. 다시는 보고하지 말라."


쉰일곱 살 먹은 김씨는 첫날밤을 치르고 이리 말했다고 한다.

"이분이 늙었는가 하였더니, 참으로 늙지 않은 것을 알았다(乃知眞不老也)."(1415년 11월 1일 '태종실록')


개국 초 조선은 여자도 남자도 똑같이 욕망과 사회적 권리를 갖는 사회였다.


주자가례와 처가살이


태종만 그랬다. 고려를 폐하고 새 나라를 창조한 신진사대부는 달랐다.

정도전이 그랬다. '남녀 간 구별이 있은 후에… 만물이 편안해진다(男女有別然後… 萬物安).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게 되면

부인이 무지하여 자기 부모의 사랑을 믿고 남편을 경멸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며,

교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서

남편과 반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정도전, '삼봉집', 조선경국전 예전·禮典)


양동마을 월성 손씨 종가인 서백당. '정승 셋이 난다'는 소문이있다.
 
 여자에게 힘을 주면 무식한 여자들이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는 소리였다.

근거는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만든 '주자가례(朱子家禮)'였다.

성리학은 정치, 경제, 사회적 권한을 장자에게 상속시켜 사회를 안정시키는 이념이다.

그 이념을 예법으로 구체화한 사람이 주희였고, 그 예법이 주자가례였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택한 신진 사대부에게 성리학은 A부터 Z까지 따라야 할 선진 이념이었다.

그 눈으로 볼 때, 조선 전통은 문제가 많았다. 특히 처가살이는.


천년 풍습 처가살이

 고구려는 여자 집에 사위집(壻屋·서옥)을 짓고 사위가 살았다.

아들을 낳아 장성하면 남편 집으로 돌아갔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처가살이다.

고려 또한 남자들은 처가에 살았다.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인해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왔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 한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1415년 태종에게 예조가 이리 보고했다.

'고려 옛 풍속에는 남자가 장가를 갔는데, 지금도 옛 풍속을 따르니(하략).'(1415년 1월 15일 '태종실록')


세월이 한참 지난 성종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풍속은 아내 부모 보기를 자기 부모처럼 하고

아내 부모도 역시 사위를 자기 자식과 같이.'(1487년 8월 6일 '성종실록')


태종 이방원 또한 처가살이를 하면서 맏아들 양녕을 낳았다.

양녕 또한 외가에서 자랐다(讓寧長於外家).(1438년 12월 7일 '세종실록')

(훗날 양녕과 친해져 권력을 넘본 외척들은 태종에 의해 처형됐다.)


세종이 뜯어고친 혼례

이 천년 습속이 전주 이씨의 개국 동지인 신진 사대부에게 썩어빠진 음란 행위로 보였다.

'주자가례'에 규정된 선진 예법 '친영례(親迎禮)'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친영례는 신랑이 여자를 맞이해 시집으로 데려오는 예법이다.

1414년 12월 22일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이 친영례로 혼인을 했다.

그런데 말을 타자마자 굴레 위 털장식이 떨어져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20년 뒤 세종이 '왕자, 왕녀 혼인에는 한결같이 친영례를 행하라'고 명했다.(1434년 4월 17일 '세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파원군 윤평이 숙신옹주(淑愼翁主)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1435년 3월 4일 '세종실록')


세종이 전격 실시한 친영례가 임진왜란 즈음에 사대부에 퍼져나갔다.

16세기 후반에는 어지간한 양반집은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며느리를 데려오는 시집살이로 풍속을 바꾸게 되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마침내 모계사회가 공식 종언됐다.

혈통(血統)보다 종통(宗統)이 우선했다.


종통이 끊기면 양자를 들여서 잇게 되었다.

형제자매, 사위가 돌아가며 치르던 제사는 맏형이 단독으로 치렀다.

재혼한 여자가 낳은 자식은 과거 응시가 금지됐다.

그래서 상처(喪妻)한 사대부는

태어날 자식들 미래를 위해 과부 대신 미혼 처녀와 결혼했다.

종가(宗家), 종부(宗婦), 족보(族譜)는 모두 이 무렵에 탄생한 개념들이다.


이언적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사임당(1504~1551)은 결혼 후 친정을 떠나지 않았다.

친정 강릉에서 4남3녀를 낳고 20년 살다가 시집 파주에서 10년 살고 죽었다.


친정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安堅) 다음 간다고 할 정도로'(어숙권, '패관잡기·稗官雜記') 큰 화가가 되었다.

그녀가 죽고 12년 뒤 태어난 허난설헌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새 세상이 바뀐 것이다.



  양동마을을 만든 사위들 


◀ 여강 이씨 종택 무첨당(無堂) 현판.
 
  이언적은 외할아버지 손소가 지은 월성 손씨 종가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역시 서백당에서 태어난 외삼촌 손중돈은 청백리로 선정됐다.

손소는 공신이다.


  외손자 이언적은 선비 최고 영예인 문묘,

조선왕조 관료로 최고 영예인 종묘에 동시에 배향됐다.

두 사람은 불천위(不遷位) 지위를 받았다.

불천위는 5대 이후 영원토록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이다.


  회재 이언적은 퇴계 이황의 스승이다.

조선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다.

동방 성리학의 태두인 이언적은

일찌감치 친영례를 받아들여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 하여

그 종가는 처가가 아니라 이곳 양동마을에 있다.


 종가에 있는 그의 제청(祭廳) 이름은 무첨당(無忝堂)이다.

'조상에게 욕됨이 없도록 하라(無忝祖考)'는

'서경(書經)' 군아(君牙) 편에서 따왔다.


  양동마을 옆에 그를 기리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았다.


  풍수가들 말에 따르면 서백당은 혈식군자(血食君子) 세 명이 날 길지다.

혈식군자는 '제삿상에 생고기를 올리는 큰 인물'이다.


  우선 둘은 손소와 외손 이언적이다.

이언적은 외가집인 이곳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이제 한 명이 남았는데,

주변에서는 "다른 집에 뺏기지 않으려고 해산이 임박한 여자는 못 오게 한다"고 수군댄다.


  정작 서백당 종손 손성훈(63)은 "나는 두 아이를 병원에서 낳았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하늘 되려 하지 않고 그 하늘을 짊어질 군자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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