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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김재로 장수동 은행나무

by 한국의산천 2008. 5. 7.

출근 길에 운동하기 [2008년 5월 7일 (수요일 날씨 흐림) 한국의산천  

인천 장수동 소래산 옆길 김재로 묘부터 장수동 은행나무까지 왕복 (2km) 걷기를 했다.

 

▲ 만의골 입구 ⓒ 2008 한국의산천

인천 대공원에서 수인산업도로를 타고 수원방향으로 약 1km 이동하다 보면 소래산 옆을 지나기전 왼쪽으로 군부대 입구가 있다. 장수동 만의골이다. 입구에는 대형식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적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민속음식점이 즐비한 곳이다. 소래산 등산 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산주를 한잔하는 곳이다.   

▲ 소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초입에 위치한 김재로 묘 안내판 ⓒ 2008 한국의산천 

▲ 걷기 좋은 산길을 약 200m 올라 간다 ⓒ 2008 한국의산천

▲ 주 등산로에서 오른쪽으로 꺽이며 묘가 나타난다. ⓒ 2008 한국의산천

▲ 김재로 묘 ⓒ 2008 한국의산천

 

김재로 묘 (金在魯 墓) 인천 광역시 기념물 제3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 64-13 

김재로 (1682-1759)는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의 아들이다. 숙종 36년(171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거친후 대사관에 올랐다가 경종2년(1722)에 신임사화로 파직되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 목사가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세웠다. 그후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조16년(1740) 영의정에 올랐다. 묘역에는 무덤뒤에 토담을 두르고 묘비,상석,망주석,석등,양석등을 갖추었다. 

 

▲ 묘비 ⓒ 2008 한국의산천 

신임사화 (辛壬士禍)

1721년(경종 1)~1722년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 
이미 숙종대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여 사문(斯文)시비를 벌였으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신임사화라는 용어는 당대부터 쓰였으나, 화를 입은 노론측의 입장이 반영된 용어이다. 노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에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辛丑獄事).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 즉 남인(南人)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두산백과 사전 참고] 

 

 

▲ 김재로 묘 ⓒ 2008 한국의산천

1 태조(太祖 1335 ~1408 / 재위기간 1392~1398)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定宗 1357~1419 / 재위기간 1398~1400)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3 태종(太宗 1369 ~1422 / 재위기간 1400~1418)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世宗 1397 ~1450 / 재위기간1418~1450)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5 문종(文宗 1414 ~1452 / 재위기간 1450~1452)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6 단종(端宗 1441~1457 / 재위기간 1452~1455)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7 세조(世祖 1417 ~1468 / 재위기간 1455~1468)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8 예종(睿宗 1441~1469 / 재위기간 1468~1469)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9 성종(成宗 1457 ~1494 / 재위기간 1469~1494)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10 연산군(燕山君 1476~1506 / 재위기간 1494~1506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11 중종(中宗 1488~1544 / 재위기간 1506~1544)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삼포왜란

12 인종(仁宗 1515~1545 / 재위기간 1544~1545)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13 명종(明宗 1534~1567 / 재위기간 1545~1567)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14 선조(宣祖 1552~1608 / 재위기간 1567~1608)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15 광해군(光海君 1575~1641 / 재위기간 1608~1623)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16 인조(仁祖 1595~1649 / 재위기간 1623~1649)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17 효종(孝宗 1619~1659 / 재위기간 1649~1659)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8 현종(顯宗 1641~1674 /재위기간 1659~1674)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19 숙종(肅宗 1661~1720 / 재위기간 1674~1720)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20 경종(景宗 1688~1724 / 재위기간 1720~1724)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21 영조(英祖 1694~1776 / 재위기간 1724~1776)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22 정조(正祖 1752~1800 / 재위기간1776~1800)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23 순조(純祖 1790~1834 / 재위기간 1800~1834)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24 헌종(憲宗 1827~1849 / 재위기간 1834~1849)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25 철종(哲宗 1831~1863 / 재위기간 1849~1863)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26 고종(高宗 1852~1919 / 재위기간 1863~1907)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27 순종(純宗 1874~1926 / 재위기간 1907~1910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묘 앞에 있는 석등 상단부 ⓒ 2008 한국의산천

이인좌의 난 (李麟佐의 亂)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두산백과사전 참고] 

 

▲ 김재로 묘 ⓒ 2008 한국의산천 

조선 역사에는 쿠데타로 당대의 정권에 도전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 흔히 성공한 쿠데타는 '반정(反正)'이라 하였고, 실패한 쿠데타는 '반역(反逆)'이 되었다. 
조선 왕조사에 있어 왕이 완벽한 정통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는 의외로 적어 27명의 국왕 중 7명에 불과했다. 또 이들을 포함해 하자없이 왕위를 계승한 왕은 10명이었다. 나머지 17명은 어떠한 형태건 왕위 계승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처럼 정통성 뿐만아니라 신하들간의 권력투쟁도 쿠데타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조선의 쿠데타는 대게 신하들간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됐다. 왕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는 오히려 권력투쟁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쿠데타는 당파의 이해관계와 직결돼 일어났다.
조선왕조에 있어 쿠데타적 성격을 띤 사건은 여럿 있었지만 ‘반정'의 타이틀로 성공한 쿠데타는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뿐이다. 이밖에 실패한 쿠데타로 이시애의 난, 정여립의 난,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등의 '반란'이 꼽힌다. 이시애의 난은 중앙정부로부터 차별받던 변경지역인(함북지방)의 반란이라 할 수 있다. [일요시사 참고]

 

계속 이어서 산길을 내려 온후 장수동 은행나무로 걷기 시작  

  

▲ 수령 800년의 장수동 은행나무 ⓒ 2008 한국의산천

 

장수동 은행나무 (인천광역시 기념물 12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63-2

은행나무는 낙엽침엽 교목으로 사찰이나 향교뜰에 많이 심었으며 은행이란 이름은 열매가 보기에 살구처럼 생겼으니 과육을 제거하면 은백색의 종자가 나온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키 30m 둘레 8.6m 수령 800년에 달하는 오래 된 은행나무로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벋어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매년 음력 7월과 10월에 재물을 차리고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였고 집안의 액운이나 돌림병이 들면 이 나무에 재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올렸다.   

 

▲ 은행나무의 커다란 밑동ⓒ 2008 한국의산천

향교의 주변에 은행나무가 많다 그 이유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행단(杏壇)은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말.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 수령 800년의 은행나무 ⓒ 2008 한국의산천

 

은행나무(銀杏나무,Ginkgo biloba)는 겉씨식물에 속하는 나무이다. 연관종이 없는 특별한 종으로 은행나무문에 속하는 유일한 종이다. 야생 상태의 은행 나무는 멸종된 것으로 몇백년간 알려져 왔으나 중국 저장 성에 일부가 발견되었다. 살아있는 화석의 예로 종종 언급된다.

다 자란 은행나무는 10~15m에 이르나 간혹 40m까지 자라는 것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0호 이며 나무의 나이는 약 1100년으로 높이 41m 둘래 11m에 이른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신라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 수령 800년의 은행나무 이지만 지금도 가을이면 열매가 가득 열린다.ⓒ 2008 한국의산천  

▲ 다시 수인산업도로로 나와 출근 ⓒ 2008 한국의산천 

▲ 농로길을 따라 출근 했다.ⓒ 200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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